17살의 여름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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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도 같이 들으실있습니다: https://johnjrenns.bandcamp.com/album/17)

(보컬을 못듣겠다면 이 반주 리스트를 들으세요: https://audius.co/johnjrenns/playlist/17%EC%82%B4%EC%9D%98-%EC%97%AC%EB%A6%84%EB%B9%84%ED%83%84-summer-heartbreak-instrumentals-3387)

17살의 여름비탄

글: JohnJRenns

1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보통의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연애가 있는 이야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왕자님과 공주님에 대한 우화를 읽으면 7살 주제에 나란 놈은 싸가지없이 이렇게 생각하고는 했다.

“내가 왜 왕자님하고 결혼해야 해? 공주님이 더 예쁜데.”

어차피 그런 책들은 내가 그런 말을 다른 아이들에게 하는 것을 어른들한테 보일 때 다 뺏겼다.

나이를 먹고 좀 더 멋나는 연애소설을 읽어도 나는 깊은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또래의 비슷한 괴짜 여자아이들이 (괴짜라기보다는, 아싸라는 표현이 더 시대를 반영할까?) 큰 열망을 가지고 내게 남자들에 향한 호기심을 털어놓았지만, 나는 한마디도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연애란 그냥 귀찮은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왕자님은 물론 공주님도 별로 상관 없었다.

시간이 더 지나고 ‘사나운 그 시기’를 거치고 나서는 사랑이라는 사상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이 똑같은 시기에 나는 친구 만들기가 굉장히 힘들어졌다.) 또래의 아이들이 겪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고백할 때는 크게 떠들석하고 헤어질 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한다. 기간은 길어봤자 6개월. 남자는 절대로 고백을 거절하지 않고 여자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온 학교로 소문을 낸다. 전부 개같은 교과서를 따라가는 것처럼 똑같이 따라 간다. 내가 보기에 사랑은 연구해야할 ‘코드(code)’의 일종이었다.

인간은 비로소 ‘사랑’이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내재적이고 자연스러운 요소라고 주장한다. 근데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인공적인 것이라고. 타인이 말하는대로 그대로 따라야 하고,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하고, 타인의 승인을 구걸하고 – 절대로 자신의 본마음을 확인해서는 안되는 것. 이것보다 더 피상적인 행위가 있겠는가?

일단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그때까지만 해도 혹시나 사랑이 내 삶에 찾아올리라는 가능성은 고려조차 하지 못했다.


직장 동료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아 씨는 혼자 사는데, 어쩜 그렇게 자기관리를 잘하세요?” 당연히 수사적인 칭찬문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나빴다.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혼자 사는 건 흔하지 않냐고, 도로 수사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는 그건 사실이지만 나는 어떤 부부들보다도 깨끗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고 싶을 노래는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난 궁금증이다. 가장 처음 생각 난 것은 비틀즈의 “A Day in the Life”였다. 그 노래의 한 절에 ‘아침에 깨어났다가 꿈 속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나는 그것이 언제나 죽음을 비유로 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깨어났는데 또 꿈을 꾸게 되는 것 – 마침 시작했는데 잠시 후 다시 끝나게 되는 것 – 그 모순어법이 죽음을 상징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케스트라가 크레셴도하는 부분은 죽음의 극적임을 잘 묘사한다.

하지만 비틀즈는 너무 클리셰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명인 노래는 택하고싶지 않다. 그래서 데이빗 보위의 “Quicksand”가 더 나을 것같다. 이유는 그다지 설명하기가 쉽지않다. 그저, 침대에서 의식을 잃으면서 그 가사, “자신을 믿지 마, 믿음으로 기만하지 마, 지혜는 죽음의 석방으로부터 올 거야”라는 구가 계속 머리에 무의식적으로 반복될 것같은 기분이 든다.  

로큰롤은 나를 구원하였다. 그래서 로큰롤은 나를 죽일 것이다. 그 또한 그것을 원할 테다.


대학 동창회에 초대받았다. 추억을 마음 속 깊이 묻은 채로 갔다. 대학 동창회에 오는 사람들은 많이 없다. 대학는 몸만 20년씩 먹었지만 정신은 오히려 유아화된 인간들이 같이 웃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술을 마시고 주먹을 날리고 섹스를 하고 같이 우는 곳이다. 그 어떤 제대로 성숙해진 어른도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를 추억에 담아 미화한다. 나는 중학교 동창회는 한번 가봤지만 절대로 고등학교 때 만난 인간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적은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무에 가깝지만 혹시 그를 만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던 것같다.

동창회의 주요 목적은 자기자랑이기 때문에 4-5년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곧 바로 서로에게 잘난 체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서 누군가가 내게 직접 물을 때까지 기다렸다. 대부분이 내가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그렇게 큰 놀라움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신문을 쓰든 소설을 쓰든 그들에게는 모두 똑같이 “돈 못버는 일”로 들렸나보다. 책 쓰기는 어린 시절의 내 열망이었다. 대학를 다니고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로 결심했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려고 할때마다 그의 이름이 다시 생각났었다. 그럴때마다 내게는 1/3 확률로 공황발작이 일어났다. 그러면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영혼을 구출시켰다. 하지만 음악보다 그의 목소리를 더욱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나는 졸업을 하고 결국 책 쓰려는 것은 그만두었다.

우리는 갈비를 먹고 술에 취하고 수다를 떨었다. 대학 때 시절의 얘기들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하자 우리는 향수를 불어 일으키는, 더욱 어렸을 때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는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3년째 방송국에서 AD로 삽질하고 있는 전 미디어과의 지혜가 중학교때 일어난 자신의 순수한 첫사랑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는 여자 학생 중에서도 전 캠퍼스에서 꽤나 유명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백한 청춘이 있었단 것에 모두 쇼크를 표시했다.

슬슬 갈비집은 연애의 기분나쁜 냄새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초점의 이야기꾼이 무언가 창피하거나 손발이 오글거리게 하는 점을 묘사할때 모두 호통을 펴 웃었지만 나는 한숨도 내기가 어려웠다.

내 차례였을때 나는 거짓말했다. 나는 거짓말을 내 직업에서 전문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럴싸해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같이 소심하고 말없는 여자아이였던 사람이 중학교때 가졌을만한 첫사랑 얘기를 했다. 대화는 한번 밖에 나누지 못한 남자아이와의 이야기였다. 당연히 나는 중학교의 3년 내내 남자아이 한명에게도 말을 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애들은 속아 넘어갔다. 모두 순수하지만 무언가 달콤씁쓸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진정한 씁쓸함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전 실용음악 작곡과인 성희가 말을 하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성희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진정한 첫사랑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아닌 바로 대학때 가졌다고도 말했다. 그것도 교수하고. (이 교수는 우리 캠퍼스의 교수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30대 중반의 유명한 남자였기 때문에 우리도 알고있었다.) 자기의 똥배만큼 목소리도 큰 전 공학과의 기유가 “왜 니 얘기만 진짜 연애 영화같이 들리냐!” 라고 큰 소리로 웃었다.

성희는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 작년이였던 고3이였을때야 그는 성정체성을 깨우쳤다고 했다. 그래서 그 전까지 가진 관계들이나 사회의 억압에 의한 혼란에 뒤섞인 성적 끌림들은 모두 허구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피아노 교수에게 느낀 그 극적인 감정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그저 옳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참으로 그의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연히 그 둘은 절대로 그런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사람들은 “성희가 그 사람하고 있었을때는 좀 이상하긴 했어”라고 떠들었다.

“생각해보니깐 말이야.” 성희가 술잔을 들어 흔들었다. 그는 웃으며 출렁거리는 액체를 주시했다. “나는 나를 마치 아버지처럼 대해주는 남자를 원했던 것같아. 내가 바보처럼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때도 남자들과 그런 관계를, 특히 선배들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가장 좋았어. 아버지처럼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지만 진짜로 내 아빠는 아닌 연상의 남자. 내 이상형은 아직도 그런 사람인 것같아. 이성애자들이 같이 섹스를 할 수 있는 어머니를 원하는 것하고 비슷한 거지.”

이 말에 방에 있던 모든 남자들은 침묵에 잠겨 고개를 흔들기만 하였다. 나를 제외한 여자들은 그저 서로를 의심스러운 얼굴로 보기만 하던 것이었다.


밤이 깊어갔다. 고기집의 절반은 잠들어있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2차에 가자는 얘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가 섬뜩해 계속 내 물잔을 바라보기만 했다. 흐리고 왜곡된 내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웃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성희가 있는 쪽으로 돌려봤다. 그는 바로 옆 탁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곁에는 같은 음악과였던 몇명들이 그에 기대며 자고 있었다. 그들은 대학 때 밴드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에너지가 없었다. 그냥 음악을 할줄 아는 애들이 이렇게 모여있으니까 저절로 생긴 밴드같았다. 로큰롤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희는 그렇게나 많은 무게가 그에게 쏠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나는 그것에 궁금증을 품었다. 나라면 성질을 냈을텐데. 재미있는 장면일테다, 사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성희는 핸드폰을 보다가 내 시선을 눈치챘다. 우리의 눈이 마주친 것에 놀라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이쪽에 있는 사람들중 깨어나있는건 우리 둘밖에 없었다. 성희는 웃으면서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어, 이름이 어떻게 되시더라?” 그가 물었다.

“시아. 이시아.”

“아. 계속 물어봐서 미안한데, 나이는?”

“27살. 괜찮아요.”

“아, 내가 한 살 선배구나.”

“그래요.”

“응. 말 놔도 돼.”

“싫어요.”

“응…”

그는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물잔을 바라봤다. 나는 그가 한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동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그것이 내 입을 열게 했다.

“그 후로 연애는 잘 되요?” 내가 그를 바라본다.

“응?” 그는 고개를 올려 나를 봤다. “아, 아니. 남자친구는 몇명 사귀어봤지만. 피아노 치는 사람이 연애를 하려고 해봤자 얼마나 가겠어. 곧바로 음악의 노예가 돼버리지.” 그는 자기비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아까 전에도 알 수 있었다.

“그렇죠. 글 쓰는 것도 비슷해요.”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물잔을 들었다. 눈을 감고 그대로 잔을 입속으로 비었다. 입을 젖히니까 나도 성희가 한 것처럼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술도 한모금 마시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런 바보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두려움은 바보같이 사그라졌다.

“그거 있죠.”

“응?”

“제가 한 이야기, 거짓말이었어요.”

성희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딴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했어.”

“진짜요?”

“최소한, 그다지 하고싶은 이야기처럼 들리진 않았어. 무언가를 빼고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래요. 왜냐하면…”

나는 말을 이어가기 전에 침을 삼켰다.

“저, 여자를 좋아하니까요.”

“아…” 그의 입이 벌렸다. 눈동자는 고개와 함께  점점 옆으로 흘렸다. “그렇구나!” 그는 목소리의 긴장감이 안보이게 위해 크게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하세요.”

“아. 그럼… 다른 사람들에겐 안말한거야?”

“왜 말해요. 그딴걸. 나한테 수작거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 되네.”

성희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팔을 뻗어서 누가 남긴 술잔을 들었다. 그는 사지를 펴서 편안하게 자세를 취했다. 나도 그것을 보고 다리를 폈다. 나는 주머니에서 숨겨놨던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사실은 집에 가면서 스트레스라도 해소할겸 사놨었는데 그때 피는게 오히려 더 나아보였다. 나는 라이터도 함께 꺼내 불을 피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담배 피는 것을 보는 것이 – 아니, 사람들이 내가 그대로 있는 것을 제외한 그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이 – 두렵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내 옆의 있는 성희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구석 쪽으로 연기를 조금씩 내보냈다. 어차피 공기를 타서 방 전체로 흘러가는게 연기지만. 나는 계속 주변의 눈치를 봤다. 내 스트레스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도 연기는 고기집 전체로 퍼져나갔다. 내 잘못이었다. 이제 자고있는 이 모두 내 입에서 나온 연기를 마시고있었다. 전염병처럼 뻗어지는 내 담배연기가 내게 사랑이라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연상시켰다. 의식적으로 마시지는 않았지만 연기는 모두의 몸 속으로 도둑처럼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강제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 벤젠이었다. 나는 나의 이기적인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일어나게 냅둔 이 재앙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죄책감은 내가 담배를 필때마다 셀 수도 없이 느껴온 그 똑같은 죄책감이었다. 그러나 나는 끊지 않았다.

나는 울 뻔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그만 두기로 했다. 괜히 대학 동창회에 초대받았다가 와서는 한마디도 안하고 모두 잘때 울다가 혼자 도망간 그런 여자로 알려지기는 싫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결국 그렇게 알려지게 된 것같다.) 나는 내 정신을 리셋하기 위해 다시 성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성희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랑같은거.”

“사랑같은거?”

“그냥 온다던가, 자연스럽게 끌린다던가. 솔직히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 시아도 좋아했던 애가 있었을거 아냐. 아니면 그걸 어떻게 알아.”

“…있었지만.” 담배를 펴서 그런지 내 목소리가 잠시 걸걸하게 들렸다. 나는 기침으로 목을 풀었다. “저는 그냥 사랑이 그렇게 낭만적이란 것이 아닌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인위적으로 창조된 거잖아요.”

“어떻게?”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절대로 듣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 살았다면 그거에 대해 생각할리가 없죠. 사랑은 그렇게 인간에게 내재적인게 아녜요. 전부 사회적이죠.”

“근데 사랑이란 것도 결국 생물학적인 반응의 결과잖아. 과학적인 원인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어.”

“그럴지도 몰라요. 사랑이 뭔지를 몰라도 저는 아마 여자를 성적으로 좋아하고 성희 씨는 남자를 성적으로 좋아하겠죠. 근데 굳이 우리가 그 여자나 남자에게 특별한 감정이나 좀 더 다른 관계를 발전하고 싶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그렇겠지. 사랑이 없는 세계에는 그게 정상일지도 몰라.”

“예. 오히려 그런 곳이 낫지 않을까요? 부끄러운 짝사랑이나 곤란한 관계 문제도 없고, 그저 사람들은 서로를 사람으로 대하는 세상.”

“음.” 성희는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나는 그런 세상에 살고싶지 않을 거같아. 사실, 그런 곳, 무섭기까지 해.”

내 담배가 다 피워지자 나는 물티슈를 꺼내 남은 담배를 싸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셨지만 목의 잿더미를 씻기는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분이었다. 나는 탁자에 머리를 기대며 누웠다.

“저는 가야될 거같애요.” 내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딴 애들한테 인사도 안하고?”

“어차피 인사할 정도로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이것은 반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학때 좋은 친구들을 만든 기억이 있다. 최소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있던 과들까지 전부 기억에 남았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기억에 나까지 남아있을까라는 질문을 대답하기가 무서워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다.

“그래. 그러면 조심해, 시아 씨.”

“그래요. 성희 씨도, 운이 좋기를 바래요. 연애하고.”

“그러면 시아 씨도 누군가를 찾기를 기도할께. 더이상 사랑이 없는 세상을 원하지 않도록 해줄 그런 사람을.”

나는 곧 일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밖으로 가는 복도에서 전 미디어과의 지혜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의 화장이 씻겨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전에 얘기를 할때 조금 우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모두 안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알고있었다.

“어, 시아야, 어디 가?” 지혜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미디어과 사람들하고는 역사가 좀 있기는 하지만.

“집에 가요.”

“아, 그래. 우리도 가야겠지.” 지혜에게는 내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던, 평소보다 힘이 덜 들어가고 강조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다시 목에 힘을 주었다. “야, 이 새끼들아!”

지혜는 사람들이 거의 다 자고있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던 방에 들어가서 모두에게 소리질렀다. 다시 시끌벅적해졌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서서 나가지도 못하였다. 성희를 포함해서 모두 서로에게 짤막하게 인사하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나는 그들 먼저 나갔다. 늦은 저녁 11시였다. 나는 고기집에서 나가서 본 그 달밤이 계속 기억난다. 달의 형태를 뚜렷 했지만 빛은 흐릿 하였다. 그 흐릿함을 기억하니 또 다른, 더욱 더 오래 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이 얘기의 가장 알맞은 귀감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 매우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나의 유일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두 여자아이들의 이야기이다. 로큰롤의 이야기이다. 이는 10년 전의 한 여름에 일어난 이야기이다.

2

송소리는 나를 살해하고 시체는 버려두고 갔다. 다음은 그것까지 이른 이야기이다.


나는 친구가 없었고 송소리는 친구가 많았다. 소리는 교실 구석의 창가 옆에 앉아있었는데 그곳은 반의 모두가 모여 서로 수다를 떠는 ‘허브(hub)’같은 장소가 되었다. 1학기 내내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았었지만 그 허브에 초대된 적은 없었다. 나는 분함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들 중 한명과 눈이 마주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때 내가 보기에도 송소리는 사람을 자력같은 것으로 이끄는 기가 있는듯 했다. 스스로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본심이 그러한 상황을 만들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한번은 두 학생이 한명이 볼펜을 뺐었다고 싸우고 있었다. 볼펜을 가지고 있던 학생은 할머니가 줬다던가 그런 소홀히 만들어낸 핑계를 댔다. 교실에 있던 나머지 학생들은 무시하거나 지켜보기만 했다. 점점 목소리들이 커지고 무시하기가 어려워지자 송소리는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들어가 가로막았다. 둘의 말을 평등하게 들어주고 서로를 이해를 못하는 그들에게 대신 침착하게 다른 쪽의 관점을 설명해주었다. 송소리는 그저 우연이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그게 가장 쉽게 갈등을 해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상황은 곧 의결되었다. 장면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어서 마치 구성적으로 적합한 노래 한 곡을 듣는 것같았다. 이렇게 송소리와 친연을 맽는 것에 당연한 이익이 있었으므로 모두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소리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는 책상에 누워 홀로 몽상에 잠기곤 했다. 특히 송소리의 존재를 그렇게 눈여겨 보진 않았지만, 가끔식 ‘내가 저 처지에 놓여 있었다면 어떨까?’라는 판타지에 휩싸 이기도 했다. 언제나 내가 이른 결론은 나라면 미쳐버릴 것이라는 것이었다. 혹시 나의 정신상태, 내 멘탈수치 그 자체까지도 바뀔지라도. 내 생각에는 소리 자신도 매우 힘들어했던 것같다. 하지만 그 힘겨운 삶에도 계속해서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그 사실 – 나는 송소리의 그 점이 호기심 갔다. 친구가 많다거나 말을 잘하단다거나 예쁘다던가, 그런 것들은 그다지 상관가지 않았다. 그저 내게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이 아이는 어째서 아직까지도 미치지 않은거지?


나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제어할 줄을 몰랐다. 게다가 한 감정에는 극적으로 집착성을 보이는 경향도 있었다. 화가 날 때는 누군가를 패지 않고서는 풀리지가 않았고 웃을 때는 하루종일 웃어봐야 겨우 풀리는 정도였다. 특히 나는 더이상 아기가 아니였던 시절에도 많이 울어댔다. 한번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멈추는게 쉽지가 않았다. 때에는 어른들은 그냥 민감한 애인가보다 했지만, 크면서 그 빈도는 더 잦아지고 더 불예측해졌다. 나는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곧 나는 무언가 심한 병을 앓고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갈때까지 나는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았다.

우울증은 그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습격해오는 지속적인 ‘정신상태’이다. 그냥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정신상태’는 사람의 세계관, 즉 생각과정 및 태도 또한 영향을 끼친다. 하는 모든 일과 보는 모든 것이 이 ‘정신상태’에 의해 가공되어 제시된다. 웃어야할 것에 웃을 수가 없고, 즐거운 것에 증오를 찾고, 가장 중요하게 울으면 안될 것들에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우울증이 생명에 치명적인 이유는 유혹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생각하는 방법을 위협한다. 우울증은 행복이라는 것 그 자체를 부러워하기 때문에 사람과 이런 독과 같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것이 정상이야. 너는 원래 이런 거야.” 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었다. 이 병은 나의 세상을 둘러쌌다.


이제 내가 수업 중에 처음으로 울은 경험을 얘기해주겠다.

한 월요일의 수학 수업 중이었다. 나는 금요일부터 학교에 있을때를 제외하고 계속 침대에만 누워 생활을 보냈다. 일어나기가 딱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강제로 일어나게 했다면 불평없이 일어났을 테다. 그저 그 침대에서 일어나서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에 가치를 느낄 수가 없었다. 숙제를 해봤자 나같은 인간 쓰레기는 좋은 대학도 못갈테고. 다른 취미를 해봤자, 누가 그걸 인정하리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꿈뿐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 자체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래서 금요일에서 주말까지는 물론 누워있기만 했다. 가족에게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충 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월요일날 학교에 와보니 평소보다도 걸음이 무거웠다. 내 의자에 앉으니 몸이 동상처럼 변해 그 자리를 떠나고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는 수학 수업이 찾아왔다. 나는 그때까지도 돌같은 내 몸을 의자와 책상에 붙인 채로 있었다. 내 숙제를 걷을 순서가 오자 나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 ‘못했어요.’ 그렇다. 내 ‘정신상태’로는 못했던 것이다. 다른 주말이였으면 몰라도 그 토요일과 일요일만큼에는 무언가 행동을 한다는 것자체가 내게는 불가능했다. 마치 교통사고를 당해 온 몸에 붕대를 감싸야 하는 것처럼, 내 정신은 피페해지고 불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수행에 반영되는 숙제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선생도 알았는지 이렇게 재미있게 대답했다.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며 다른 순서로 넘어갔다. 그 더 이상은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이 말은 마치 두 창이 되어 내 두 눈을 향해 날라와 찌르는 것처럼 나를 격타했다.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깜박 거릴 수가 없었다. 아니, 몸의 어떤 근육을 움직이는 것도 아팠다. 더욱 움직였다가는 더욱 아플 것 같앴다. 내가 시도해봤자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면, 애초에 왜 무릅써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점점 주변의 소리들은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교실이 소용돌이처럼 변해져 나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항 안에 갇힌 물고기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현실을 닥쳐야만 했다. 나는 종이가 없어서 사과서를 못쓴 것일 뿐이었는데, 타인들은 내 잘못이라고 하고, 그것을 못 이룬 이유는 내가 시도를 하지 않아서, 내 의지가 충만하지 않아서라고 할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했다. 내게 그 순간 갑자기 그 사실이 상기되었다. 왜 하필 나라는 불만 – 왜 또 내 탓을 하냐라는 분함, 그리고 이 모든 것, 혹은 어느 것도 바꾸지 못하는 자신에 향한 허무감. 이 모든 감정들은 갑작스럽게 한번에 겪게 되었다. 결국 내 눈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실은 인지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엎드려 마치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눈을 가리니까 오히려 눈물은 더 잘 나왔다. 그래서 그당시 내가 유일하게 알던 현실도피 방법을 취했다. 나는 글을 썼다. 글을 쓰니까 눈물이 멎었다. 글을 읽으니까 눈물이 다시 나왔다. 나머지 30분동안 나는 이러한 행동들을 반복하였다. 학교종이 울릴 때쯤에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마치 평생을 전투하는데에 몸을 바친 것같은 탈진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 그 아무도 나의 전투를 목격하지 않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여름비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내가 겪은 경험은 여름방학의 넋만큼 큰 고통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음악은 모든 것이였으며 모든 것은 음악이였다.

송소리에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란 많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으로 둘러싸있었고 사람으로 둘러싸여야 마땅한 그런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달라붙은 친구들이라는 애들은 애완동물보다는 하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바로 옆에 앉아있기 때문에 가끔 홀로 보내는 그 시간들을 잘 지켜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는 그다지 상관이 가지 않은 아이였지만, 누구든지 궁금증은 있었을테다. 도대체 소리 자신은 무엇을 하는지 좋아하는지. 왜냐하면 소리의 취미는 다른 이들의 취미에 대해 들어주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궁금했다.

송소리는 혼자 있을때마다 이어폰을 귀에 꼽아 음악을 들었다. 나는 수없이도 그가 눈을 감으면서 조용히 노래를 듣는 장면을 보았다. 창가에서 나오는 햇빛이 그의 얼굴에도 비쳐졌다. 그러다가 마치 딴데 달려있는 눈이 본 것처럼 누군가가 오는 것을 인식하면 바로 이어폰을 빼고 눈을 떠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에는 생각치 못했지만, 따스한 햇빛을 비춘 눈을 감고있는 무표정의 얼굴이 그의 평소의 미소보다 훨씬 더 진실 어리고 아름다웠다.


나는 ‘보여지는’ 것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공공장소는 물론 사람의 시선이 가는 그 어떤 곳이든 나는 싫어했다. 사람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기를 원했다. 나는 누군가를 나를 보고있다던가 하는 느낌이 들면 바로 몸을 감추었다. 나는 배경이 되는 법을 익혔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차피 친구를 만들 수도 없는데 만들어봤자 뭘 하냐고 –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꺼려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마땅치 않았다.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면 부끄럽지만 – 먼저 송소리가 나를 발견했다. 마치 주인을 잃은 개처럼 나 자신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가 나를 보고, 눈을 계속 기울고, 결국 말까지 걸어왔다는 것이 전부 송소리에게 특별한 점이었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해준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한 대화는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건 좀 그렇지만,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지만 나는 그 일이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딱히 특별한 일이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좀 터무니없다고 하는게 더 옳을지도.

쉬는 시간이었다. 꽤나 조용한 교실이었다. 나는 수필을 쓰고 있었다. 일기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내가 관찰한 사회현상들을 글로 담아 정리하고 있었다. 내게는 이것이 대화를 대신 했다. 누군가와 얘기하면서 정보를 이해하고 문맥을 재생성화하는 대신에 나는 그 모든 일을 혼자서 글을 쓰며 했다. 고독하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이 일을 행했다. 나에게는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뭘 쓰는 거야?”

이건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건데, 정말로 몇주일만에 누군가가 대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전에 누군가가 내가 떨어뜨린 것을 주워준 적이 있었다. 이건 딱히 나 때문에 말을 걸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카운트되지 않는 것같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먼저 본능적으로 글을 가렸다. 혼란스럽게 나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 과정에 내 손은 책상과 부딪혔다. 그 파격은 큰 ‘쿵’ 소리를 냈고 책상에 있던 다른 종이들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더욱 엉망진창하게 되었다. 송소리는 눈을 부릅떴다. 처음엔 당황하며 뒷걸음을 쳤다. 하지만 내 몸이 떠는 것을 보고는 앉아 종이를 집어줬다. 나는 뺏어가듯 종이들을 그의 손에서 앗아갔다. 나는 그 종이들을 꼭 안으면서 송소리의 얼굴을 째려봤다. 그는 미소를 때지 않았다.

“그건 뭐야?” 그가 자리를 유지하면서 물었다.

“뭐라고?”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목소리가 나오는 것 자체가 아팠다.

“뭘 굉장히 열심히 쓰고 있으니까… 궁금해서.”

소리는 두 손의 손가락들을 모으며 서로를 휘고 돌리는 귀여운 동작을 했다. 나는 눈썹을 낮췄다. 눈을 한번도 깜빡거리지 않으며 계속해서 소리를 매섭게 쳐다봤다.

“그걸 네가 알 필요가 있어?” 나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했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도로 바라지는 않았다.

“에에….?” 소리는 입을 벌렸다. 곤란함이 얼굴에 띄었다. “그건 알려주기 싫다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리는 내 말에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고, 게다가 나와 똑같은 수법을 쓰며 질문형으로 대답했다.

“그럼, 글 쓰는건 좋아해?”

이 질문을 할때 송소리의 목소리에는 다른 따스함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대화의 주체를 갑자기 바꾸는 것으로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는 내가 이 대화가 어떻게 가기를 원하는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이 질문은 듣고 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내가 계속해서 떨어졌던 그 종이들을, 마치 내 아기인 것처럼 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첐다. 나는 그것들을 책상에 다시 펼쳐 정리하기 시작했다. 팔이 움직이면서 입이 다시 열릴 것같기도 했다. 송소리는 그저 기다려주기만 했다.

“좋아한다기 보단…” 나는 내 책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크게 말해줘.”

“좋아하다기 보단 – “ 내 목소리를 높였다. “- 해야하는 것을 하는 느낌이지.”

“그래? 대단하다. 나는 글을 쓰려고 해도 못쓰는데. 책은 좋아해?”
“응.”

“그렇구나. 지금 뭐 읽는건 있어?”

“있는데 말해주지 않을 거야.”

“그렇죠. 그런 식인거죠…”

소리의 표정은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계속해서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소리는 내 옆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리는 헛기침을 하며 내 앞의 자리에 대신 앉기로 했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섬세하게 의자에 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너는 뭐야.” 내가 말했다.

“나? 나를 모르는 거야, 시아야? 내 이름은 송소리야.”
“그거 말고. 너는 뭐하는 놈이야.”

“나는 뭐하는 놈이지…”

소리는 손을 턱에 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질문으로 보였다.

“그냥, 사람하고 있는 걸 좋아하는 놈이랄까?”

“하지만 너는 사람하고 있지 않을 때도 있어.”

“그렇지. 가끔은 휴식도 필요한 법이야. 음악처럼.”

“음악?”

소리가 음악을 언급하자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것에 궁금증을 품었다. 나는 그가 듣는 것이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가 미치지 않은 이유였을까? 그것이 송소리의 피신처였을까? 나는 음악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었다. 나는 음악이 – 로큰롤이 – 인간을 구하고 사랑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였었다.

“맞아. 음악은 내게는 구출과도 같아. 아, 사람들한테서 구출하는건 아냐. 오히려 내 자신에게서 구출해준다고 할까. 노래를 듣는건 마치 여정을 떠나는 것 같아서야.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 멀리 떠날때의 그런 기분을 줘. 내게 음악은 ‘구원’해주는 것이야. 너도 책 읽는게 그렇지 않니?”

“어? 응. 맞아.” 나는 그의 말에 너무 집중을 들여 그가 내게 도로 무엇을 질문했다는 것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표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료했다.

“그럼 너는 내게 네 구세주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내가 너한테 내 구세주를 보여줄까?” 송소리는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뭐라고?”

“이것 좀 꼽아봐.”

송소리는 핸드폰에 연결되있던 이어폰을 내 귀에 꼽아줬다.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차가웠다. 하지만 그건 내 몸이 너무 뜨거워서였다. 나는 그 즉시 몸이 얼어버렸다. 팔로 무언가를 하고 있던 것도 멈추게 되었다. 그렇게 마비되어 있는채로 나는 사랑이라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그것은 몸 뿐만이 아니라 내 마음도 붙들어놓았다.

콧노래와 기타 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콧노래는 합창단보다 큰 화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음조는 깨끗하고 선명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기타와 베이스는 음경 전체를 뒤덮고 있지는 않았지만 특히 그 가벼운 베이스 소리는 위의 모든 화음의 기초를 잡아주고 있었다. 드럼이 약하게 들어오면서 리듬 감을 확고했다. 가수가 부르는 멜로디는 음정 간격이 높은 수사하기 어려운 멜로디였지만 음이 낯든 높든 그는 따스하고 유유한 태도로 불러 나갔다. 이 멜로디 아래에서 모든 것의 바탕이 되주는 화음들은 음계를 상승하며 진행했다. 악기들은 물론 그 목소리들도 계속 위를 향하며 나아가는게 정말로 ‘구세주’를 향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걸어가는듯한 기분을 연상시키게 했다.

노래의 이름은 “Here There and Everywhere.” 더 비틀즈의 1966년도 곡이였다.

To lead a better life
(너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I need my love to be here
(내 사랑이 이 곳에 있어야만 해요)

– “Here, There, and Everywhere,” 더 비틀즈

3

그 다음 날이었다. 방과 후 나는 언제나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근데 처음으로 집에 있는게 스스로 자신을 감금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감옥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무언가가 내 몸을 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잠을 자려고 하면 가위가 눌려 휴식도 취할 수가 없었다. 이 폐쇄적인 분위기가 너무나도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같았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6월의 미지근한 햇빛이 방에 들어왔다.

나는 무언가가 – 혹은 누군가가 – 나를 구원해주기를 바랬다.

나는 유일하게 내 집에 있는 음악 CD를 틀었다.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1집이었다. 흥겨운 재즈 록과 듣기 좋은 발라드로 이루어진 앨범이라서 내 부모님은 집안일을 할때마다 이 앨범을 틀었다. 그래서 나한테는 이미 소음과도 같았다. 근데 인간에게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자신에게는 일상이라고 생각한 익숙한 것들이 극한 문맥에는 새롭게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CD를 들으면서 ‘혹시 소리도 이런 음악을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자꾸만 했다. 어떤 일을 하려든 그의 생각이 났다. 어떤 길로 새매려고 해도 송소리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됐다.

나는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아직도 삶에 흥미는 가지 않았다. 의미따위는 찾기 싫었다. 그저 그 방에 계속 있다가는 내가 질식사할 것같애서 참지를 못했다. 혼자서 울다가 죽는 것보다는 밖에서 열사병으로 죽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나는 음악이 내 발을 이끌도록 허용하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머지 않아 음반 가게 앞에 서있었다. 굉장히 낡아보이는 간판에는 ‘소리 Soundscape’이라고 적혀있었다. (소리소리풍경. 재미없다.) 한번도 보지 못한 곳이였는데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곳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문 사이로 들리는 피아노 선율을 들었다. 햇빛은 쬐어 내려왔고 얼굴은 땀으로 적시기 시작했다. 다른 아무도 내 옆을 지나가지 않았고 문을 여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혼자서 그 피아노 멜로디를 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주는 것같았다.

“시아야?”

나는 뒤를 돌았다. 그때 누군가가 말 그대로 내게 손을 뻗어주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지만 갑자기 들려온 정체불명의 소리에 내 뇌는 쇼크받아 시야는 흐려졌다. 내 눈이 다시 초점을 맞추고 나서 발견한 것은 송소리였다. 반팔과 반바지로 이루어진 간단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무슨 의미인지는 지금까지도 모르겠지만 빨대를 입에 깨물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교복을 입고있었는데, 아직도 쇼크가 사그라지 않아 입을 벌리고있는 내 모습과 대조가 이루어졌다. 송소리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걱정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땀나는 것좀 봐, 얘.” 소리의 입에서 빨대가 떨어졌다. “그렇게 안더운데… 아니, 들어가자, 시아야.”

“에…” 나는 어떤 소리라도 만드려고 노력했다.

소리는 내 팔을 잡고 박치게 문을 열고 가게 안에 들어갔다. 소리가 잡고 있던 내 팔의 부위에 온기가 새겨졌다. 나는 따라 안에 들어갔지만 곧 내 시야는 다시 흐려졌다. 입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도 없었다. 내 얼굴에 열이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얘, 얼굴이 왜 이리 빨개. 아빠! 물수건 좀 가져와.” 소리가 카운터 뒤에 앉아있던 아저씨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는 그 어떤 놀라움도 표시하지 않고 일어섰다. “예, 예.”

“자, 시아야. 여기 앉아.”

소리는 나를 소파에 앉혀놨다. 그때 나는 다시 제대로 보게 될 수 있었다. 소리는 옆의 정수기에 물을 뜨러 간 사이에 나는 가게 안을 둘러봤다. 바닥은 나무로 되어있었고 천장에는 주백색 전등들이 달려있었다. 가게의 넓이는 놓여있는 것들에 비해 좁은 편이라 걸을 데가 거의 없었다. 내가 앉아있는 데는 소파와 의자 몇개, 그리고 탁자가 있는 가게 구석의 휴식 공간이었지만 다른 벽면들엔 선반들이 빽빽히 전시되어 있었다. 가게 중간에는 음반을 들어볼 수 있는 레코드판 하나가 있었다. 거기서 내가 들은 피아노 노래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반들에는 음반들이 착착히 쌓여있었다. 대부분은 LP 바이늘 레코드로 보였지만 CD만 전시되어있는 작은 선반이 따로 다른 쪽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소리에게서 들어서 배운 것들이다. 그 당시에 나는 CD든 뭐든 상관하지 않았다.)

소리가 내게 찬 물을 건넸다. “자.”

“응.” ‘고마워’라는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편안히 앉아있어.”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레코드판을 만지락 거리고 있었다. (뭐를 하고 있던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얼굴에는 무표정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또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소리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그 미소는 기억에 남아있었다. 평소 학교에서 다른 애들에게 보여주는 미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본심이 보이는 것같았다. 그건 내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놀랐어. 시아가 우리 가게 앞에 그렇게 서있으니까.”

“…네 집 가게야?” 내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응! 그거 있지, 사실 내 이름은 이 가게 이름에서 따온 거야. 반대일줄 알았지? 아빠도 참…”

소리는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인다. 화장실로 보이는 곳에서 소리의 아버지가 나와 적신 수건을 가져 들어왔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소리와 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인사를 하려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소리가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그에게서 수건을 

소리는 수건을 내 이마에 댔다. “차가워?”

“내가 할께.” 나는 물 컵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아냐, 괜찮아. 얼굴이 완전히 빨갛잖아, 얘.”

나는 소리가 또 수건을 내게 대기 전에 그걸 잡아채갔다. 나는 수건을 펴 그걸로 내 얼굴을 뒤덮였다. 냉기가 내 감각을 마비시켰다. 마치 연기라도 날 것같았다. 내가 얼굴을 닦고 앞을 바라보자 소리는 반대 편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아빠는 열중쉬어 자세로 우리 둘을 지켜보다가 다시 카운터 뒤로 걸어갔다.

나는 수건을 탁자에 두고 소리 대신 천장 위를 바라봤다. 아까 소리가 말한 대로 나는 편하게 등을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 피아노가 훨씬 더 잘 들렸다. 나는 음악에 몸을 잠겼다.

“이건 내가 친건데… 좋은 추억이다.” 소리는 말한 다음 코를 흥얼거렸다.

“너가?” 나는 눈을 떴다.

“응. 그냥 고등학교에 가기 전에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서… 하루 스튜디오를 렌탈했어.”

“하루만?”

“하루에 스물 곡을… 세 시간쯤 녹음했을까?”

“음.” 나는 감탄하는 투를 숨기려고 했다. 소리는 아마 좋아했겠지만.

“아, 지금 이건 푸치니. 쇼팽하고 드뷔시도 했어.” 다 19세기 작곡가들이었다. 나도 그쯤은 알았다. “음반 두 개로 나눠 녹음했었는데, 하나는 이거, 딴 거에는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 18세기.

“클래식을 좋아해?”

“많이는 아니. 사실, 그 여섯 명 곡들밖에 잘 몰라, 하하.” 소리가 피식 웃었다. “그중 베토벤이 가장 좋아하는 것같아. 베토벤은 세상 최초의 록스타였으니까.”

나도 이 말을 듣고 웃음이 나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소리를 바라보며 눈치를 봤다. 그녀의 미소는 더욱 넓어졌다. 소리는 의자에 일어서 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아는 음악 들으러 온 거야?”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지나가던 거야. 음악이 들려서 섰는데…”

“헤에~ 그럼 내가 친 음악때문에 멈춘 거야?”

나는 두 손을 모아 무릎에 올렸다. “…응.”

소리는 키득거렸다. “히히. 언젠가 내가 라이브라도 해줄께.”

소리는 내 옆에 앉았다. 거의 어깨가 닿을 거리에 앉았다. 여자끼리라서 괜찮다고 그는 생각했나보다. 나는 조금 더 옆으로 가서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고개는 그 반대 편으로 쳐다봤다. 소리가 나를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어색했던 것이 기억난다. 더이상 음악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아는…”

“뭐?” 내가 본능적으로 목소리에 반응해 소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 소리는 눈을 부릅 떴다. “시아는 그, 뭐더라, 그런 타입인가?”

“뭐.”

소리는 조금 나하고 거리를 뒀다. “교복말고 입는 옷이 없는…”

“어, 으… 응.”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너무 티가 날 것같았다. 그래서 조금 눈을 내렸다.

“아! 아니면 그것도 패션인가??” 소리가 손뼉을 쳤다.

“…그래.” 나는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하자.”

다시 음악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침을 꿀꺽 삼킨 다음에 결심을 하고 머리를 돌아 소리를 보았다. 소리는 또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눈을 마주치지는 않고 소리가 입고 있던 것들을 보았다. 셔츠는 하늘색 줄무니였는데 몸에 비해 너무 커보였다. 바지는 면반바지였다. 다리에는 그가 학교에서도 언제나 입고다니는 반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말하고 싶은 몇가지 것들이 생각났다. ‘치마말고 반바지에도 잘 어울린다, 양말.’ 변태같이 들린다. 아마도 여자끼리라서 괜찮았겠지만 나라면 기분이 이상했을 것같았다. ‘그거 다리에 맨날 신고다니는 거, 덥지 않아?’ 무언가 이상하다. 그냥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같은 대사같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너도 입고 다니는게 좀 이상해.’ 이것은 거의 말할뻔 했지만 곧 소리가 다시 침묵을 깨트렸다. 

“저번에 들려준 건 좋았어?”

“뭐?”

“미안. 나는 재미 없는 음악만 좋아해.” 소리는 고개를 숙였다. 미소는 계속 있지만 눈썹도 내려갔다. “비틀즈는 할아버지나 좋아하는 거지…”

소리는 말끝을 길게 늘였다. 점점 목소리에 힘이 사라져갔다. 나는 그것을 듣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소리의 미소는 또 유지하기 힘드는 것처럼 보였다 –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인지했다. 내가 지금, 굉장히 간단한 이 말만 한다면, 그는 다시 그 미소를 보여줄 수 있을텐데.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바보같은 인간에게 빠지면서 나도 바보처럼 되어갔다.

“아냐. 나는 좋았어.” 나는 주먹 쥔 손을 소파에 두었다. 

소리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정말?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다…”

소리의 얼굴은 다시 밝히 빛났다. 나는 또 바보처럼 멍하게 그것을 바라봤다. 소리는 다시, 히히, 하며 웃었다. 소리는 심호흡을 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다른 거 재밌는 것 좀 듣다 갈래?” 소리는 레코드판 쪽으로 걸어갔다.

“응?”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거의 다 집에 데려가서…” 소리는 손을 입술에 갖다 댔다. “아, 그럼 언젠가 내 집에 놀러와! 피아노도 쳐주고, 비틀즈보다 더 좋은 거 들레줄테니까, 히히.”

나는 심장이 멈춰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머리로 열이 들어왔다. 나는 탁자에 있던 수건을 잡아 손으로 만지작 거렸다. 소리는 계속 나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무언가 부끄러운 것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흔히 내가 이런 열과 경험하는 ‘굴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 명의 눈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의 증거이다. 나는 그래서 쉽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응!” 소리는 살짝 제자리에서 위로 뛰었다. “약속이다, 시아야?”

“약속.”

“그럼.” 소리는 레코드판을 바라봤다. “아, 일단은 다른 거 틀어줄까?”

“아니.”

나는 다시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피아노 선율이 내 귀로 흘러갔다. 검은 배경에는 송소리가 직접 내 눈 앞에서 그것을 치는 것이 보였다. 너무나도 편안한 풍경이었다. 그 공간은 벌써 나한테 집보다도 온화한 장소가 되어있었다.

“이걸로 괜찮아.”

나는 구원받고 있었다.

4

그 후로 밤에 자려고 할때 가위는 눌리지 않았지만 그냥 잠이 오지를 않았다. 나는 언제나 힘들어있는 것에 익숙해있어서 이것이 굉장히 곤란했다. 12시에라도 당장 나가서 밖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나는 바뀌고 있었다. 음악은 내 머리를 떠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참동안 다시 밖에 나가지 않았다. ‘소리 Soundscape’에 가지도 않았다. 송소리와도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내 삶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 분명히 삶에 흥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이란 막상 ‘변화’가 찾아오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언제나 하는 것들을 계속 해서 했다.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음악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글 쓰는 것조차 나는 예전처럼 다시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나 글을 쓸 수 있던 이유는 나는 언제나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열등감을 연료로 썼다. 글을 쓰는 동기중에 가장 효과적인 동기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을’ 의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복수’이다. 과거에 나를 얕잡아 봤거나, 나한테 ‘그런 걸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라고 말했거나, 나를 믿지 못할 눈으로 본 그 모두에게 ‘꼴좋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의지로 나는 글을 자주 썼다. 복수는 냉정하게 하는 것이 재미라고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복수는 불타오르는 의지이다. 내게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송소리의 목소리가 생각날 때마다 그런 생각들은 무리가 되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안나왔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몸이 마비되었다. 머리는 점점 열로 가득 찼고 다리가 떨렸다. 에너지가 계속 마음 속에 쌓였지만 그것들을 내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를 대신 써보기로 했다. 나는 시를 읽지 않는다. 너무 형식적이고 제한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산문을 쓰는 것은 나를 자유롭게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제한’으로 보였다. 그리고 시를 씀으로 나는 내 머리 속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음악을 무언가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다음은 내가 그때 쓴 시중 하나이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춰도
징징 울어대는 아이는
제자리에 서있다

도와줬다가는
자기도 당할까봐
징징 울어대는 아이는
도망을 간다

동동동 구르는 다리도
펑펑펑 흐르는 눈물도
‘구해줘’하는 법을 모르면
아무 소용 없을지니

징징 울어대는 아이가
성인이 되면
심장이 멈추고
호흡이 멈춘다

거의 ‘의식이 흐름’ 형식으로 썼다. 그래서 처음에는 운을 맞추려고 했지만 매우 빠르게 포기한 거다. (내가 처음으로 쓴 시중 하나다. 좀 봐줘라.) 특히 세번째 절은 음절이 너무 많아서 사실 마치 소설을 쓴 것처럼 읽힌다. 그래서 ‘~지니’로 끝내서 무언가 시적인 매력을 추가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는 처음 절을 인상시키는 묘사를 함으로써 마치 똑똑하고 여러모로 많이 생각을 해놓은 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곧 단어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거의 익사할 뻔 했지만 곧 헤엄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익혔다. 나는 계속 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음악이 들렸다. 나는 몰랐지만 나는 바로 그 음악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송소리’라는 사상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지 며칠 후에 일어난 일이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또 나는 책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 속에서 들리는 울림을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일, 이, 삼, 사, 일, 이, 삼 – 일, 이, 삼, 사, 일, 이, 삼… 박자를 반복하면서 자신을 최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 속으로만 새겼다. 곧 내 머리는 이 박자에 따라서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 다리는 일, 삼, 일, 삼에 움직였고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다른 박자 – 이, 사, 이, 사에 까딱거렸다. 그러면서 이 음악은 내 정신을 완전히 정복해버렸다. 나는 곧 무의식 상태로 들어갔다. 박자를 유지하는 것은 마치 내게 숨쉬는 것과도 같아졌다.

이러한 무의식속에 내 의식은 단어들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마치 래퍼가 하는 일과도 비슷했다. (랩같은 건 들은 적 없지만) 곧 나는 이 머리 속의 단어들을 입으로도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 머리는 운이 되는 어느 단어들은 전부 불쑥 내보내기 시작했다. ‘여름은 타는 더위 / 기만의 거짓 사위 / 유혹이 덧딘 어휘’… 곧 이런 단어들은 주문처럼 변했다. 나는 완전한 무아지경에 빠져 공허에서 성(城)을 만들었다.

누군가 나한테 부딪혔다. 나는 몸에 어떤 근육에도 힘을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땅에 넘어졌다. 나한테 부딪힌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엎드린 채로 바닥을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직도 무의식 상태였기 때문에 상황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내가 방금 무엇이 일어났는지 내면화한 것은 내 숨소리가 들렸을 때쯤이었다.

나는 팔로 바닥을 잡아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옆에 송소리가 서있는 것도 보였다. 뒤를 돌자 내 앞에는 나하고 충돌한 남자아이와 그의 친구로 보이는 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들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다가 부딪힌지는 잘 몰랐지만 사실 그런건 상관도 안했다. 나는 내 시야가 흐려지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몇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또 알아챈 것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숨소리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까까지만 들렸던 박자는 사라져있었다. 갑자기 공포가 마음 속에 들어왔다. 나는 확인하기 위해서 손가락을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감각조차 느껴지지가 않았다. 내 앞에 있던 아이들은 말하는 것을 멈추고 나를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박자나 율동이 아닌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폭발이 났을때 귀에 나는 울림같았다. 잡음의 움량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곧 잡음은 숨소리를 탈취했다. 내 동공은 커졌고 다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흐린 시야는 점점 검해졌다. 머리가 아파왔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끔찍한 잡음은 마치 비명같았다. 내가 지를 수 없는 비명을 이 무언가가 대신 해주고 있었다.

잡음이 멈춘 건 송소리가 내 어깨를 잡았을 때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숨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천천히 들리기 시작한 건 다른 애들의 말소리였다. 나는 남자애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하고 부딪힌 그 한명만이 계속 나를 보고있었다.

“시아야, 괜찮아?” 송소리가 내 어깨에서 손을 풀며 물었다. “보건실에 갈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송소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남자아이는 물론 다른 애들은 전부 나를 혼란스러워하며 보고있었지만 송소리는 나를 걱정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에 따뜻하면서도 무언가 심각한 것을 인지하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계속 말하려고 노력헀지만 아직도 목소리만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을 감자 마지막으로 알아챈 것이 있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온기까지도 이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정리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말로 묘사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지금 와서 말하자면 ‘살해욕구’였을 것같다. 그것은 분노나 절망에 의한 욕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아까 그 잡음을 들으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해서 많이 얘기할 수는 없다. 당신도 나중에 가서는 이해할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묘사해두겠다.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한 걸음 늦게 알아챈다.


나는 그 다음 시간에 조용히 교실에 들어왔다. 일부러 나는 그 남자아이를 피했다. 그도 내게 다시는 접근하지 않았다. 이대로가 평화라고 생각한다.

방과후에 나는 재빠르게 달아날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한대로 송소리가 나를 뒤에서 불렀다. 나는 어쩔 수없이 서야만 했다.

“시아야.” 송소리가 미소를 보이려 하며 말했다. “오늘 시간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우리 둘 중간의 사이를 밝혔다. 송소리는 곧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오늘 내 집에 놀러오고 싶어?”

송소리는 두 손을 등 뒤에 모았다. 나는 나가던 여자아이들 몇명이 “뭐야, 나도 소리 집에 간 적 없는데!”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소리는 그들에게도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었다. 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입으로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음악이 죽은 후에 내 목소리도 죽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에 소리는 ‘이건… 예, 인가?”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것은 마치 고개를 끄덕인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그에겐 그랬나 보다. 지금 생각하니까 소리는 그냥 나를 데려갈 어떤 핑계라도 찾고있었나 보다. 소리는 웃으며 내게 다가와 내 두 손을 잡았다. “가자!”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그 상황을 제대로 가공할 수가 없었다. 소리의 손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때서야 나는 드디어 “응.”이라고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소리와 함께 걸으면서 나는 세가지 사실들을 배웠다. 

첫번째는 송소리는 이타적인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아까 나를 초대했을 때 먼저 내가 오고 ‘싶냐는’, 즉 원함을 먼저 물어봤다. 올 ‘수’ 있냐는 것도 아니고 올 ‘거냐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그는 절대로 아래를 보면서 걷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군가하고 부딫히지 않게 앞의 사람이 자신을 인지하기도 전에 먼저 비켜주었다. 그의 모든 동작 – 그가 나를 초대했을때의 말투에서 그가 걷는 방법까지 – 그 전부 ‘자신’을 고려한 적은 없었다. 

두번째는 ‘소리 Soundscape’는 학교와 내 집에서부터 꽤나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 날 내가 혼자서 그곳으로 걸어갔던 것이 우연이였는지 혹은 정말로 운명이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집은 그 음반 가게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나는 곧 바로 두 곳의 위치를 기억했다.

세번째를 말하기 전에 연관되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고싶다. 사람들은 ‘환경’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 – 가족, 친구 – 등등뿐만이 아니라 말하는 언어, 먹는 음식, 자란 문화, 그리고 사는 장소 또한 포함된다고 한다. 특히 누군가의 방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흔히 알려져있다. 이것은 잘 모르겠지만 송소리가 사는 곳은 그에 대해서 흥미로운 점을 알려준다.

송소리의 집은 주거 구역에서 꽤나 떨어진 한 언덕 위에 있었다. 언덕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산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소리와 그 곳을 올라가면서 자주 아래를 본능적으로 쳐다봤다. 만화나 영화같은 데에서 등산을 마치면 무언가 좋은 경치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를 올라가는 길은 언덕의 가장자리를 쭉 이었기 때문에 어디에 있든 아래가 훤환히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말한듯이 집이나 다른 상가들에서 멀리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차 도로나 산책로나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송소리는 매일 이 곳을 올라 내려갔다 하면서 마치 온 세상이 보이는 것같은 이 풍경을 보며 살아온 것이다. 모든 사람이 보이고 모든 구름이 보였다 – 이 곳을 올라가기만 해도 마치 왕이 된 것같았다.

막상 소리의 집 앞에 서니 그런 들뜬 기분도 사그라졌다. 유난하게도 한옥 식의 형식을 취한 집이었다. 당연히 크기는 작은 주택 크기였다. 외부는 좀 허름해 보였다. 소리는 문을 열고 아무 생각도 없이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당시 몰랐지만 어차피 안에 아무도 없었다. 소리는 이것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소리의 부모님은 거의 하루종일 일을 하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나 보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망설였다. 하지만 소리가 내게 손을 뻗자 나는 먼저 집 안에 들어갔다. 그런 부끄러운 모습은 보기 싫었다.

나는 소리를 그의 방으로 따라갔다. 내가 그곳에서 본 것은 말로는 차마 묘사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그렇지만, 일단 여자의 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벽은 선반들로 완전히 가려져있었다. 침대와 책상이 붙어있는 쪽에는 음반이 대신 걸려있었다. 선반들은 반은 음반들이었고 반은 책들이었다. 책은 몰라도 누가 이렇게나 많은 음반들을 놓은 선반을 가지고 있는 건 처음봤다.

책상에는 교과서와 학습지들이 쌓여있었다. 키보드 악기 또한 보였다. 컴퓨터는 안보였다. 사실상 하늘색이었던 침대를 제외하고는 색이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 음반들이 마치 전시된 미술 작품들처럼 미를 이루었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마도 예뻐보이는 커버가 있는 것들을 골라서 벽에 걸어놓은 모양이다. 역시 그건 여자답다. (계속 계속 여자답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바보냐 너는, 이시아?) 침대와 책상 중간에 있는 건 레코드판이었다. 가게에 있던 것보다는 더 낡아보였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하나밖에 없는 전등은 깜빡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될까. 이런건 ‘오타쿠’의 방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송소리의 방은 내 방과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내 방은 더욱 작고, 선반들은 작은 대신에 책만 있고, 벽에 걸은 것은 아예 없지만 최소한 컴퓨터는 있다는 것. 누가 두 곳을 봤으면 자매들의 방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 점은 내가 빨리 알아챘다. 그래서 내가 얼굴에 보인 놀라워함은 소리에게는 곤란함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방이 이래서 미안.” 소리가 가방을 의자에 올렸다. “거기 앉아도 돼.”

나는 바닥에 놓였던 베개에 앉았다.

“마실 거 가져올건데, 뭐라도 듣고 있을래?”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소리가 무엇을 틀테까지 기다렸다. 소리는 이것을 알아들었는지 바로 옆에 서있던 선반에서 음반을 꺼내기 시작했다. 무언가 검은 노란색 배경에 남자의 얼굴이 보이는 커버였다. 나는 깜빡거리는 전등을 쳐다보며 기다렸다.

소리는 앨범을 틀어놓고서는 기다리라면서 차를 가지러 갔다. 블루스 풍의 피아노 연주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쾌활한 반조가 들어오면서 경쾌한 컨트리 노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렴 부분에는 트럼펫과 색소폰 등의 목관악기 반주가 흥얼거릴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레코드의 질이 낡아서 가사는 잘 안 들렸지만 이 부분만은 잊을 수가 없다. “변화는 나를 도와줄 거야…(Change is gonna do me good)

소리가 틀었던 앨범은 엘튼 존 경의 1972년 작품 “Honky Château”. 첫 곡 “Honky Cat”의 호른 연주가 이 낡지만 삶이 붙어있는 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곡은 5분정도였다. 점점 페이드아웃 하면서 끝나가니 송소리가 문에서 차 두 잔을 들고 왔다.

“아, 첫번째 노래는 완전히 놓쳤나?”

송소리가 내게 잔 하나를 건네주며 내 반대편에 앉았다. 그러면서 다음 곡 “Mellow”의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거, 두번째 게 좋아.” 소리가 말했다.

배이스와 드럼이 보컬과 함께 뚫어오며 노래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밝은 피아노의 음색이 어두운 화음들을 따라가며 가수가 이렇게 부르는 것이 들렸다. “우리가 느끼는 이 감정은 감미(Mellow’s the feeling that we get) / 불타는 석탄이 내는 빛을 보면서(Watching the coal fire glow)”.

3분쯤 경에 반주가 시작됐는데 무언가 들어보지 못한, 오르건의 음색을 가졌음에도 마치 현악기처럼 연주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검색해봤지만, ‘일렉트릭 바이올린’ 연주였다.) 다시 목소리도 들어오면서 그 악기의 연주와 가수의 목소리가 무언가 사악하게 들리는 조화를 이루었다. 

“여기 부분이 좋지?” 소리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응.”

“나는 이렇게, 밝으면서도 슬프게 들리는 노래가 좋아.”

“그래.” 나는 바닥을 쳐다봤다. “그런데 말이야…”

“왜?”

“너는 컴퓨터가 없어?” 계속 음악을 들으면서 궁금했다.
“아. 공부할때 필요하면 PC방에 가면 되니까… 내 거를 가진다고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아서.”

“그렇구나.”

나는 송소리를 바라봤다. 그는 학교에서 음악을 들을때처럼 눈을 감으면서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무표정을 짖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눈을 떴는데,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그 다음 노래는 좀 더 빠른 템포의 피아노 록이었다. 나는 곧 바로 이번에는 연주보다는 가사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변화’니 아니면 ‘사랑’이니같은 주제 타령만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다르게 들리는 단어들이 나왔다. “사람인 것도 지루해져(I’m getting bored being part of mankind) / 인류는 시간낭비일 뿐이야(This race is a waste of time)”.

그리고 후렴구는 나한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중에 배웠지만 이 노래의 제목이 바로 여기서의 첫번째 구였다. “자살해 버릴 거야(I think I’m gonna kill myself) / 자살하면 며칠동안 수다거리가 될테니까(Cause a little suicide sticks around for a couple of days) / 자살해 버릴 거야(Yeah, I’m gonna kill myself) / 신문은 청소년들의 블루즈(비탄)에 대해 무엇을 적을까(I’d like to see what the papers say on the state of teenage blues)”.

이런 반항적인 가사들은 흥쾌하고 무도회에서 춤이나 출만한 연주 위에서 불리고 있었다. 특히 후렴구 후에 “blues…”라는 단어와 함께 노래가 갑자기 느려지는게 정말로 박자를 따라 손가락을 까딱하기가 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번쨰 절에는 유머스러운 경향도 있었다. 대충 노래의 이야기는, 부모님이 자동차를 못타게 하고 10시까지 집에 오라고 잔소리 하는게 싫증나는 한 청소년이 ‘자살이라도 하면 관심을 살 수 있을까’라며 바보같이 투덜거리는 것이다. 나는 소리가 안말해도 이 노래가 한 40~50년전 쯤에 만들어졌으리라 알고 도대체 누가 1970년대에 이딴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어…” 나는 차에 입술을 댔지만 곧바로 너무 뜨거워서 바닥에 놨다.

“응?”

“이건 누구 노래들이야?”

“아.” 소리가 또 부끄러워하며 히히 웃었다. 소리가 잘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건 엘튼 존이야. 지금은 한… 70세시겠지?”

“아.”

“왜? 좋아?”

“괜찮은데. 가사가 좀 재밌어서…”

“가사가??” 소리도 차를 바닥에 두었다. “시아야 너, 이거 다 알아듣는 거야?”

“뭐?” 나는 황당했다. 그때 나는 또 늦게 알아차렸다. 모두가 나만큼 영어를 잘 하는 건 아니라고. 계속 까먹는 사실이다.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렇다.

“우와, 시아, 너 영어를 잘하는구나?”

“그런 것도 아니야.”

“근데 나는 이런 거 하나도 못알아들어.” 소리가 계속 놀라워하며 얘기했다. “나는 그냥 음악이 좋으면 좋은 거야. 근데 시아는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다음 노래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Susie (Dramas)”라는 곡이었는데, 제목답게 댄서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 하프 연주자에 대한 노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호기심이 있던 내 얼굴에 그런 밝음이 사라지니 소리도 다시 눈을 감고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가? 자신같은 것 자체는 상관없는 일이다. 외국인처럼 부모님이 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어본 적은 없었고 별로 묻고싶지도 않다.

“글쎄. 자신의 이름같은 건 별로 상관 안해.” 내가 말했다.

“그래? 내 이름은 조금 웃기긴 하지만 참 좋아. 내 바보 아빠가 삶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한 것중 하나야.”

소리는 웃었다. 가볍고도 암울했다. 그가 한 말 하나 하나에는 각자의 무게와 감정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를 계속 관찰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송소리라는 여자아이는 음악 자체가 되어 나를 홀리고 있는 것같았다.

다음 곡이 시작되자 갑자기 소리는 일어섰다. “아. 이 다음 노래가 가장 좋아, 이 앨범에서, 나는.”

“그래.” 나는 차 잔을 집어 호호 입을 불었다.

“사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노래지만. 그래도 명곡이야.” 소리는 자기 침대에 대신 앉았다.

노래는 처음에는 피아노 발라드로 시작하지만 점점 70년대 로큰롤 그 특유의 구식 베이스 소리가 드럼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노래는 거의 1분씩이나 이렇게 첫번째 절을 펴며 음악성을 발전해내고 단화음은 긴장을 고조했다.

드럼들이 비로소 모든 요소를 들어내며 후렴구로 우리를 내보냈다. 어쿠스틱 기타는 마치 폭발하는 큰 소리로 후렴구를 시작해냈다. ‘우우’하는 보조 보컬들이 장화음을 이루며 천사같은 음성을 냈다. 전에 비틀즈 노래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같았다면, 이 노래는 마치 ‘우주’로 올라가는 듯한 기분을 형성했다. 완전한 희망이 아닌, 무언가 달콤씁쓸한 잿더미었다. 특히 멜로디는 그 노래보다는 좀 더 빠르고 반복성이 강했지만 그 반복하는 구절에 ‘비애’ – 혹은 ‘감미’ – 라는 감정의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후렴의 마지막 부분에 ‘Rocket man’이라고 부르는 구절에는 모든 목소리들이 마치 해방의 비명을 지르는 듯 했다. 피아노와 기타, 베이스, 드럼 – 모든 것이 마음을 솟아오르듯 하게 만들었다.

“저기, 시아야…” 소리가 반주 부분에 말을 걸었다.
“왜.”

“그, 이 노래는 뭐라고 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 소리는 나를 내려봤다. “언제나 알고싶었어… 부탁이야.”

“…”

나는 바닥을 바라봤다. 가사를 기억해내고 또 한국말로 바꾸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나는 눈을 감으며 단어들을 재구조했다. 조금 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집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사람들은 내가 달라졌단 걸 알게 될 거야. 나는 우주 비행사. 혼자서 불타오르는 우주 비행사…”

가수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나는 다시 송소리를 바라봤다. 그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눈은 계속 감겨 있어서 눈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울고 있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음악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때 바로 그의 무표정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음악에 완전히 감정이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내 목소리는 그 음악의 일부분이 되어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차를 놔 고개를 숙였다. 음악이 귀에 울렸다. 울리고 솟아올랐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이 바로 내게는 구세주였다. 구원의 손이 뻗어져나간 것은 나였는지 송소리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이다.

 And I think it’s gonna be a long, long time
(내 생각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Til touchdown brings me ’round again…
(다시 집으로 돌아와 착륙하기까지 말이야)

– “Rocket Man (I Think It’s Going to Be a Long, Long Time)”, 엘튼 존

5

방과후에 송소리네 가게로 가는 것은 내게 일상이 되었고 생활양식이 되었다. 몇시간 동안이나 우리는 음반을 틀어놓고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그저 서로 곁에 있어주었다. 우리의 관계에는 뚜렷한 발전은 없었다. 나는 애초에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의외로 송소리도 딱히 말이 많은 애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반을 틀기 전에 송소리는 혼자서 떠드는 때가 있었다. 그가 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하는 말 하나 하나를 주의 깊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송소리가 듣는 밴드와 음악가들의 이름을 전부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나도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비틀즈, 롤링 스톤즈, 비치 보이즈, 엘비스 프레슬리, 더 후, 더 스미스, 더 큐어, 픽시즈, 섹스 피스톨즈,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킹크스, 무디 블루스, 클래시, 수지 앤 더 밴시스, 지저스 앤 메리 체인, 더 폴, 조이 디비전, 카펜터스, 오아시스, 블러, 너바나,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마이클 잭슨, 키스, 엘튼 존, 밥 딜런, 버디 홀리, 딥 퍼플, 왬, 그레이트풀 데드, 라몬즈, 반 헤일런, 데이빗 보위, 폴리스, 토킹 헤즈, 보비 풀러, 나인 인치 네일즈, 퀸, 커티스 메이필드, 빌리 조엘, 제퍼슨 에어플레인, 스틸리 댄, 캔, 루 리드, 스퀴즈, 프리텐더스, 더 낵, 엘비스 코스텔로, 심플 마인즈, 돈 헨리, 소프트 셀, 덱시스 미드나잇 러너즈, 질 스콧 헤론, 스완스, 샘 쿠크, 데이 마잇 비 자이언츠, 윈, 카디액스, 버팔로 스프링필드, 빌리지 피플, 돈 맥클린, 브라이언 아담스, 핑크 플로이드, 킹 크림슨, 예스, 더 잠비즈, 프랭크 자파 & 마더스 오브 인벤션, 더 레지던츠, 보리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선 킬 문, 스트록스, 랜시드, 어게인스트 미, LCD 사운드시스템, 더 리플레이스먼츠, 칩 트릭, 빅 스타,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텔레비전 퍼스널리티, 더 러빙 스푼풀, 앳 더 드라이브 인, 아트 어택스, 데드 케네디스, 앤드류 잭슨 지하드, 드라이브 라이크 제후, 고릴라즈,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 존 콜트레인, 킹기자드 앤 리저드 위저드, 뉴트럴 밀크 호텔, 오페스, 더 크립스, 포르투갈 더 맨,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러시, 이글즈, 소닉 유스, 더 스위트, 아-하, 에밋 로드스, 알버트 하몬드, 마일스 데이비스, 알 이 오 스피드왜건, 올맨 브라더스 밴드, 다이어 스트레이트, 스타랜드 보컬 밴드, 스투지스, 펄 잼, 슬리츠, 벨벳 언더그라운드, 스파크스, 와이어, 애로스미스, 도어즈, 언도톤스, 플리트우드 맥, 제이 가일스 밴드,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스티비 원더, 스틸리 댄, 크림, 댄 디콘, 피쉬만즈,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배드 컴패니, 모트 더 후플, 제네시스, 두비 브라더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아시아, 브루스 스프링스틴, 바비 콜드웰, 몽키즈, 사이먼 앤 가펑클, 디보, 블론디, 버글스, 조너선 리치먼, 제프 버클리, 카디건스, 에벌리 브라더스, 플레이밍 립스, 푸 파이터스, 홀 앤 오츠, 그린 데이, 화이트 스트라입스, 스웰 맵스, 위저, 더 카스, 지미 잇 월드, 조니 캐시, 레드본, 러커스, 다이애나 로스, 티어스 포 피어스, 매튜 와일더, 터틀스, 잉크 스팟스, 클로버스, 오리올스, 레이븐즈, 엘 도라도스, 애니멀스, 시릴 데이비스, 척 베리,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 닐 영, 아메리카, 보스턴, 시카고, 캔자스, 올린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제프 로젠스탁, 프린스, 슈슈, 데스 캡 포 큐티, 맥알몬트 앤 버틀러, 다니엘 존스톤.

전부 다 들었다.


나는 곧 송소리의 언어를 익혔다. 나한테도 선호하는 밴드들이 생겼고 가끔식 그것은 송소리와 달리하였다. 음악에서부터 대화가 이루어지면 송소리는 전에는 안보이던 기쁨을 보였다. 나와 함께 있으면 소리의 자기주장은 더 뚜렷해졌다. (처음부터 사람하고 얘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진 요소가 무엇이나면 애초에 무슨 말을 할지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느 형태의 장점이다.) 이렇게 그는 나처럼 되어갔고 나도 그처럼 되어갔다. 인생을 살면서 최초로 진심어린 미소를 하는 방법은 배웠다.

우리는 모리세이의 웃기는 목소리와 존 마의 찰랑거리는 기타 연주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로버트 스미스가 썼을 만한 마스카라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비틀즈 중에서 가장 천재인 작곡가는 누구인지에 대해 말했다. 우리는 비치 보이즈의 “Pet Sounds” 음반에서 가장 좋은 곡이 무엇인지 말했다. 데이비드 번의 양복과 데이비드 보위의 페이스 페인팅에 대해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보위 음반은 ‘Station to Station’이였고 그는 ‘Young Americans’를 좋아했는데,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앨범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고르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Somebody Up There Likes Me’, 그는 ‘Golden Years’였다.) 우리는 엘튼 존과 빌리 조엘의 피아노 연주를 비교했다. 우리는 섹스 피스톨즈와 그린 데이와 클래시의 폭발하는 에너지에 들뜨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전 비틀즈 디스코그래피를 암기해가며 마치 대학 강의를 하듯이 내게 말해갔다. 나는 대신 논술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픽시즈의 ‘Surfer Rosa’를 들었다.

학교에서도 송소리는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미소는 더이상 날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것을 보고 소리가 좀 더 ‘나대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송소리의 ‘형상’이 위협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들에게는 모욕이나 다름 없던 것이다. 혹시 내가 송소리와 친해져서 그제서야 들리는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점점 아이들이 수근거리는 송소리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내 귀에도 흘려왔다. 나는 소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위해서 걱정했다. 하지만 일방향인 걱정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송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기 자신을 유지했다. 그리고 나는 소리로 인하여 자신을 잃어갔다.

우리는 살인의 여름 햇빛을 피하며 레코드 가게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송소리가 음반을 조작하고 있는 것을 봤다. 이 세상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송소리 만을 바라보았다. 저기 너머에 달이 떠있었을 때는 나는 그 봄여름겨울가을 CD를 들으며 울기도 했다. 그럴 때 송소리에게 전화가 오면 우리는 그대로 밤을 새며 서로에게 말을 했다.

우리는 말도 안되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해 말했다. 그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 내 삶에서 가장 긴 30일이었다.

6

여름의 종결 이전에 내가 쓴 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중 가장 아픈 건
추억에 박힌 여름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다

여름은 타는 더위
기만의 거짓 사위
유혹이 덧딘 어휘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다

그건 가을의 희망
그건 하늘의 비난
그건 모두의 피난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다

그건 너의 목소리
그건 삶 바꾼 음악
그건 내가 걷는 길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다

여름은 부순 기억
배운 슬기의 이력
고백의 눈물 피력(披瀝)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 중 사랑하는 건
노래하는 네 방주
느끼는 건 짙은 향수.


인정하기가 조금 이상한 사실이지만, 나는 그때까지 사람을 만지는 느낌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 가족은 비정상적인 가정은 아니지만 딱히 사회적인 인간들로 이루어져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나는 물리적인 애정을 안받고 지내왔다. 혹시 그런 것을 너무 많이 받는 것보다 아예 안받은 것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 엄마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 팔을 잡아준 (손이 아니라 팔이었다. 엄마는 이상한 여자였다) 것을 제외하고는 그런 애정표현을 자주 해주지 않았다. 물론, 말로는 사랑을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럼에도 이런 개같은 여자로 큰 것이다. 아마 엄마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하교 길에 송소리와 같이 레코드 가게로 가고있었다. 나는 송소리의 걸음을 따라갔는데 그의 등이 보였다. 그의 머릿결은 가슴 길이까지 길었는데, 여름 햇빛과 비치며 윤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어깨들을 스쳐갔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 앞의 여자아이 뿐이었다. 예전이였다면 절대로 혼자로 이렇게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들은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횡단보도가 보이자 우리는 서로 옆에서 같이 섰다. 이렇게 나란히 설때마다 나는 가슴이 박쳐서 죽을 것만 했다. 커플은 둘로 치고, 그냥 친구 사이인 사람들도, 이렇게 서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시야에는 안 보이면 어떻게 하는 걸까? 그냥 아무 말도 안하나? 힐끔 쳐다봐주거나 그래야 하나?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이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하나도 몰랐다.

그때까지 이르러 내가 송소리를 보는 방식에는 ‘싫증나는 녀석 -> 이상한 녀석 -> ??? -> 내가 좋아하는 녀석’ – 이런 전개를 거쳐왔는데, 이 모든 단계에서 그는 나하고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생각했다. 그의 옆에 있기는 커녕, 그가 보인다는 것 자체가 나는 이례인 상황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둘이 ‘친구’로서 나란히 서있다는 것 – 동등한 위치에 서있다는 것 – 그것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특히 내 속마음에는 이 관계를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다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불이 푸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내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불이 바뀔 때쯤이 되자 걸음을 옮기려고 했는데 내 왼팔이 어떤 무게에 감싸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옆을 돌자 보인 것은 나와 팔짱을 낀 송소리의 모습이었다. 이미 더운 날씨였지만 내 왼쪽 팔을 갑자기 불타는 것처럼 열을 받기 시작했다. 그 열은 내 머리로도 점점 올라왔다. 나는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마쳐지기 전에 나는 내 팔을 후려쳐 송소리를 떼어냈다.

불은 파랗게 되고 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먼저 횡단보도를 걷기 시작했다. 송소리는 기분이 나빠하지 않고 그냥 혼란스러워 하는 것같아했다. 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안다녔으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손까지도 잡고싶었다. 근데 그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순간 혐오의 감정으로 반응하였다. 나같은 인간이 감히 송소리와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기혐오였다. 재밌는 점이 있다면, 송소리가 실제로 팔짱을 꼈을 때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내가 떼어 내니까 그제서야 어떤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얘!” 나는 내 목소리를 높였다.

“응?” 송소리는 웃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아야 왜? 만진게 싫어?”

“사람들 보잖아…”

“아~”

송소리는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마치 내 손을 뺏어가는 것처럼 잡고 얼굴을 내 들이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했다. 넘어질 것같다고 생각했지만 송소리가 더욱 쎄게 내 손을 쥐어 잡아주었다. 나는 처음 소리가 내게 손을 내밀어준 때가 기억났다. 그때 그는 내 팔을 잡고 나를 이끌었었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온 세상은 하얗게 되어버렸다. 눈 앞에 보인 것은 그의 의기양양한 미소 뿐이었다.

“보라고 하는 거야.”  

그때 사람을 만지는 느낌이 어떤지 배웠다.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리는 한강을 마주보고 있었다.

도심에 사는 우리에게는 한강의 방대함이 유일한 자연의 인상이었다. 한강의 청록색 흐름을 계속 보다보면 최면에 걸리는 느낌이 든다. 그 강은 결코 깨끗한 강이 아니다. 검고 오염된 흐름이다. ‘한강에 가까이 산다’라는 신기함이 사라지고 나면 아무 메리트도 남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송소리는 이 강을 좋아했다. 나를 데려온 것도 당연히 소리였다. 그는 내가 말하곤 했다. “한강 안에는 추억이 들어있어. 수천년간 흐르면서 역사를 같이 가져온 곳이야. 하지만 나는 중요한 역사나 위인들의 일을 얘기하는게 아니야. 여기를 보다보면 일상을 들여볼 수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흘러서 이 큰 곳에서 무엇을 했었는지. 그런 면에서 한강을 보는 것은 노래를 듣는 것과 같아.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울게 되. 너나 나와 같은 사람이 노래로 이야기를 담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사는 것처럼 이해하게 되. 한강을 보면 다른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는 그렇게 오래 말한 뒤 “아니면 그럴까?” 라면서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 한순간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후 송소리는 부끄러워 하며 내 손을 잡고 한강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한강을 마주보는 언덕 위에 앉아서 강이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것 역시 지나가겠지.” 송소리가 말했다.

“너는 그걸 원하니?” 내가 말했다.

“그렇진 않아.”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면 울고싶진 않아.”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송소리는 웃었다. “고마워. 하지만 시아가 그런다는 말이 아니야.”

“그러면 어떤 말이지? 말해줘.” 나는 나답지 않게 계속 그에게 질문했다.

“나도 모르겠어. 나는 시아의 생각이 더 재미있을 것같아.”

“네가 나와 말을 그만 둬도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따위 인간은 너같은 사람과 지낼 자격이 어차피 없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소리는 목소리를 높혔다.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바뀌었다. “시아야, 넌 대단해… 넌 말을 액면대로 이해하는게 탈이야. 하지만 그렇게 감성을 찾는 건 멋져.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만 내 생각을 만들 수 없으니까.”

“그런가.”

“나는 시아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 시아도 똑같이 생각한다고 믿고싶어.”

“당연해.”

“그래도 영원한 건 없으니까… 나는 그걸 잘 알아.”

“누가 그런 말을 하지? 그 사람에게 항의할 건이 있는데.”

“하하…” 소리는 약한 웃음을 내보냈다. “아마도 나에게 항의할 수 밖에 없을텐데.”

“그러면 무리다.”

우리는 한강을 쳐다보면서 잠시의 침묵을 가졌다. 나는 송소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한강의 흐름이 반사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기로움이 담겨있었다. 그가 말하던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토대로 하고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우리중 한명이 떠나버리면…”

송소리가 말했다.

“서로 잊어주자.”


7월도 끝나가고 있었다. 송소리의 집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간 날이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여름의 하루였다. 단언컨대 운명같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날 송소리는 평소보다 기운이 없었다. 그의 주변에 집적거리고 다니는 애들은 그다지 다른 것을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나도 그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 분명한 불안의 표시가 들어나 있었다. 나는 이기적이게 학교에서 그에게 다가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방과후에는 무언가 달랐다. 보통 학교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는 송소리가 바로 집에 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전과는 다른 섭섭함을 느꼈다. 나는 그를 쫓아가서 앞에 서 집에 가려는 길을 막았다. 아무 말도 없이 나는 그냥 그 앞에 서있었다. 송소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같기도 했다.

송소리는 레코드 가게에 가고싶지 않았고 나는 더이상 묻지 않았다. 송소리가 집에 아무도 없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도 나는 이미 그를 따라 언덕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집에 있는 것은 전보다는 덜 어색했지만 그래도 조금 이상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바로 소리의 방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소리를 따라 냉장고와 TV등이 있는 큰 안방으로 들어갔다. 반대편의 벽은 열려있었는데 마당으로 이어졌다. 또한 부모님의 침실인듯한 방도 있었지만 거기는 가지 않았다. 나는 안방에 앉아 내 귀 사이로 휘날리는 바람을 느꼈다.

소리가 보이지 않아 나는 뒤를 돌아봤다. 소리는 무릎꿇고 앉은채로 바닥을 보고있었다. 나는 그가 기도라도 하고있는줄 알았다. 침묵에 잠긴 채 나는 고개를 숙인 송소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고있었다. 나는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안방에 비춰지는 햇빛과 그 빛이 만드는 그림자를 보았다.

송소리는 일어나자마자 크게 ‘헉’하고 숨을 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치 상사에게 변명을 하듯이 그는 미안하다고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에 그는 내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사과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요즘에 잠을 잘 못자서.”

“잠을 못자?”

나는 반사적으로 수면에 대한 부분을 반복했다. 나는 반대로 여태까지 잠을 못자다가 송소리를 만나고 그나마 괜찮아졌기 때문이다. 혹시나 소리에게는 그 반대가 진실일까봐 나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을 했다.

“응, 괜찮아. 시아가 걱정해주니까 좋네.”

“뭐?”

“그럼, 시아는 아무 것도 걱정 안하고, 상관 안하는 애같으니까… 아, 그게 좋은 말인가?”

송소리는 웃으며 다시 곧바로 밝은 얼굴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머리에 전구라도 뜬 것처럼 감탄하며 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아마 또 음반을 가져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리가 그의 방에 들어간 사이에 나는 바닥에 누웠다. 바닥은 차가웠고 시원했다. 유난히 계속 바람이 부는 날이어서 더욱 시원했다.

송소리는 몸에 키보드를 매고 돌아왔다.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소리는 그대로 누워있으라고 했다. 송소리의 말로는 이건 다른 데에 안 꽂아도 알아서 음을 내는 키보드로 보였다. 소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키보드의 다리를 설치했다.

송소리는 아무 설명도 없이 피아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키보드라서 깨끗한 피아노 음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멜로디가 예쁜 선율을 이루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음악이었지만 클래식에는 아무 자신도 없었기에 나는 조용히 기억을 되새겼다. 하지만 오래 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소리네 레코드 가게에 처음 왔을때 스피커로 들린 그 피아노 곡이었다. 분명히 송소리는 푸치니의 곡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검색해봤지만, ‘투란도트’라는 오페라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아리아였다.)

나한테는 송소리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감정 변환이 연주를 통해서 들려왔다. 점점 세기가 강해졌지만 절대로 속도가 늦춰지거나 빨라지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그의 연주를 듣는 것이었지만 그의 실력은 한눈에 (아니면 한 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곡 자체는 간단했다. 하지만 그 소박함을 이용해 송소리는 자신의 감정을 덛붙힐 수 있었다. 키보드에서 나오는 그 각자의 음에는 땀과 눈물과 함께 흘러나오는 것같았다.

1분 30초밖에 지속되지 않은 짧은 연주였다. 소리는 내가 아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리와 음악을 듣고 얘기를 나누면서 혼자서 무언가 특별한 관계를 맺는 줄 알았다. 학교에서 지내는 그런 애들과는 다르다고 자신을 여겼다. 하지만 나도 소리가 감정표현을 한 것을 그 30일동안 본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가 스스로 보여주고 나니, 자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도 다를 바 없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소리를 빤히 바라보니, 그는 이것을 내가 너무나도 감격을 받아서 그런줄 알았나보다. 그는 자기 혼자서 또 웃었다. 한참의 침묵 후에 그의 웃음이 들리자 나도 정신을 차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뭐를 할지 몰라서 그냥 소리 앞으로 걸어갔다. 소리는 나를 이상하게 보며 “왜 그래?”라고 했다. 나도 그 질문을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이토록 마음 속에 묻혀 왔던, 계속해서 생각나는 똑같은 한 말이었다.


“좋아.”

“…응?”
“좋았다고. 연주가.”

“아~ 그렇지…” 소리는 실망한듯 했다. “당연한거 아냐?! 그래도 고마워.”

송소리는 두 손으로 내 두 손을 잡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무엇을 말했고 그 무엇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해 내면화하지 못했다. 그냥 소리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었다.

“자, 자. 더 재밌는 거 칠 수 있으니까. 듣고 싶은 거 없어?”

“네가 원하는 걸로 해, 송소리.”

송소리가 놀란 얼굴을 만들었다. “지금 나, 송소리라고 했어?” 

“싫어?”

“아니. 내 이름은 말한 거, 처음 아닌가 싶어서. 히히.”

송소리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만들고는 키보드에 무슨 설정을 돌리고 있었다. 음을 바꾸는 것으로 보였다. 곧바로 다시 치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현악기와 비슷한 신스 소리가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듯한, 우아하고 편안한 음이었다. 어머니의 포옹과 같은, 어딘가 귀익고 향수를 불어키르는 음악이었다. 송소리가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치기 시작하니 나는 바로 노래를 알아차렸다. 바로 봄여름가을겨울 1집의 수록곡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였다.

내 놀라움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송소리가 어떻게 이 노래를 아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하필 이 앨범에서 나오는 노래를 골랐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런걸 물어볼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음악에 자신을 잠기기로 하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반주에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리는 연주를 잠시 느리게 하며 나를 바라봤다.

“시아야, 이거 노래 알아?”

“어?” 나는 그제서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응.”

“우와, 그럼 대단하네. 나는 그냥 TV에 한번 나온게 기억나는 건데.”

“TV에? 광고같은 데에?”
“아니, 그 밴드가 연주한 거. 밴드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노래 전체는 다 기억나.”

“그걸… 다 외운 거야?” 나는 나조차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기억나는 대로 하던 거야. 근데 시아가 아는 거라면 완벽하네! 시아가 불러줘.”
“뭐?”

“그… 코드만 기억나. 그니까 보컬은 잘 몰라. 시아가 노래를 불러줘.” 잘 이해는 안갔지만, 일단 노래를 불러주라는 부분은 알아들었다.

“싫어.” 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진짜… 빨리~”

소리는 오른손으로 내 손을 잡고 왼손으로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아침에 학교에서 본 표정하고는 다른, 나만 아는 그 진실어린 두 눈과 나만 아는 입가의 그 미소를. 이 아이가 이 얼굴을 간직할 수 있었으면 했다. 이 아이가 잠을 못자서 집에 오자마자 바닥에 앉아 조는 이 상태에서도 억지로 미소를 내지 않아도 됐으면 했다. 나는 이 아이를 위해서 100개 – 아니, 1000개의 미소를 선사해주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 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들었다.

나는 소리의 손을 꽉 잡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도 어릴 때부터 다 외워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TV에서 한번 곡을 듣고 그것을 다 기억하는 송소리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소리를 계속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소리는 키보드 건반을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는 그 얼굴을 나는 바라보니 빠질 것만 같았다. 내 앞에 있는 이 사람하고 내가 같은 세상에서 – 같은 시대에서 산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후렴구가 찾아오자 소리는 나한테서 손을 떼고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덧붙여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완전히 반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도 송소리의 옆에 서서 계속 노래를 불렀다. 목이 찢어질 것같이 불렀다. 부끄러웠지만 이 아이가 듣는 것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도 나라면 이 연주를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를 원했다.

내 입술은 말라가고 눈시울은 젖었다. 우리는 잠시 동안 하나가 되었다. 서로를 변해가면서, 무(無)를 무언가로 만들면서.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그래 나도 변했으니까
너의 변해가는 모습에
나도 따라 변한거야

– 봄여름가을겨울,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7

[컨텐츠 경고: 본문은 성적인 묘사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잠시 성(性)에 대한 고찰을 가져보겠다.

사람들은 사랑을 느낄때 먼저 의심을 한다. 나 또한 내 감정들을 의심했다. 특히 나에게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가 송소리에 대해 느낀 감정이 ‘연애’의 감정이란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는 그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끼고 부터 였다. 어느 사람들은 반대의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바로 성적인 욕구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순수한 연애의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 사람들의 말은 나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성적인 욕구를 느낀 적이 없다. 그리고 여자 중에도 – 그 적은 여자들 중에도 – 송소리가 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어의 선택은 고의로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순수’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사랑보다도 멍청한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단어들을 부르는 단어가 있나?) 인간은 순수하지 않다. 깨끗하지도 않다. 인간은 더럽고, 거칠고, 그리고 음흉하다. 한 인간이 어느 상황에 관하여 수백만가지 다른 생각들을 가지지 않는 적은 없다. (물론 그 생각들의 대다수는 성적인 생각이다.) 그들의 몸은 흉측하고 끊임없이 분비물을 배출한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구토를 해대고 아무 의미도 없는 형상을 감상하면서 지 혼자 액체를 눈에서 뿌린다.

하지만 인간에게 적용되는 마디중 하나는 ‘약하다’이다. 인간의 피부는 얆고도 얆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포들은 재생력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인간은 조금의 상처로도 쉽게 죽을 수 있다. 과연, 인간보다도 쉽게 죽는 존재는 없다. 우리는 심지어 죽음을 물리적인 형상만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동료에게서 버림받을 때의 사회적 죽음, 그리고 기억에서 잊혀질 때의 역사적 죽음 등등, 이렇게 체계화 해놓는다. ‘순수’라는 이 단어는 이 중에서 ‘사회적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할 때를 위한 기준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약위해서 금방 이 ‘순수’함이라는 베일은 찢겨지고 만다.

어째서 사람들은 ‘성’에 ‘순수’라는 개념을 강요할까? 마치 ‘자본주의’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반적일 뿐이다. 나는 송소리를 생각하면서 한번도 그의 몸이 깨끗하다고 – 말하자면 ‘비단정’할 것이라고 –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최대한 그에 관해서 마치 상품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한 더러운 부분을 상상했다. 어려웠다. 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보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그 유리문을 깨뜨리고자 하는 욕구도 판타지의 한 요소였다. 나는 그와 거칠한 것들을 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 생각만을 해도 나는 우울해졌다. 현실에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도 맞았지만, 감히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슬퍼졌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를 더 알고 인간처럼 대해준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도 그를 물건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들을 하고 싶다고 느낀 인간은 바로 송소리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사랑인줄을 확신했단. 내가 하기 싫은 생각이었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곧, 사랑은 하고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혹시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저 고지 사항이 필요하다. 나의 어릴 적 이야기라고 해도, 현재 어른으로서 그런 기억을 돌이키면서 묘사를 하는 것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내 최선을 다해 묘사를 짧게 두겠다.

내가 처음 송소리를 성적으로 본 것은 그의 벗은 모습을 봤을 때였다.


이미 언급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출석부 담당이었다. 교실 외 수업이 있으면 내가 가장 늦게 나가고 문을 잠궈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내가 가장 먼저 가서 문을 열어놔야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반의 그 누구도 그런 담당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절대로 수업 시간중에 다른 교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였다.

체육 시간 바로 전이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다른 애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변기에 앉아 기다렸다. 이런 더러운 곳에서 옷을 갈아입는게 기분 나빴다. 무엇보다 다른 애들과 같이 갈아입는 것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장 늦게 나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체육관에 조금 늦게 온다고 아무도 눈치채지는 않았다. 나는 교실에서 문을 잠고 여유입게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나는 교실 문을 열어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 봤다. 아무도 없어야 할 교실에는 송소리가 서있었다. 불이 다 꺼진 교실에서 유일한 광원인 햇빛이 그를 강조하듯 비추었다. 그는 윗옷을 벗고있었다. 바지는 이미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맨 가슴이 보였다. 햇빛은 그 부분을 주로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잘 보였다. 작았다. 어째서 속옷이 가리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팔을 올렸다. 나는 그의 겨드랑이를 보았다. 그의 몸은 깨끗했다. 송소리의 체구는 자그만 했다.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로. 멀리서 봐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소리의 모든 곳은 작았다.

(세상에. 못살아. 나는 왜 살아있는 거지. 씨발, 내 인생 가지고 뭘 하는 거냐.)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송소리는 내가 거기 있다는 걸 모른줄 알았다. 나는 바로 머리를 돌리고 뒤로 가려고 했다. 어디로? 좋은 질문이다. 체육복은 내 가방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걱정할 시간이냐, 그런 것을. 나는 뛰어 도망가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못본 척을 할 수 있었다.

“시아야? 너는 도대체 뭐하는 거니?”

나는 고개를 돌았다. 송소리는 내 눈 앞에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는 체육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바보처럼 조마조마하며 다리를 구르고 있던 것을 보고있었을 테다. 송소리의 몸이 또 보이자 내 눈에 다른 배경물은 새하얘졌다. 숨을 참았다.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끔찍한 표정을 지고 있었을 것이다. 새빨갛고 끔찍한 얼굴을.

“너!” 지금 생각하니, 비명을 지르긴 했던 것같다.

“응?”

“왜… 왜 아무 것도 없어?” 단어를 잘못 선택했다.

“뭐라고? 농담하는 거니?” 송소리는 눈을 찌푸렸다.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 보이잖아!”

“아…” 그는 팔로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려우니까.”

“미쳤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미쳤구나.”

“얘, 시아 너 진짜…”

“덮어라! 덮어!” 나는 내 팔로 눈을 가렸다.

“시아는 안 갈아 입어? 늦을 거야.”

“나는 화장실도 괜찮으니까!”

송소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화장실에서 오는게 아니었-”

나는 교실 문을 확 닫았다. 메아리 소리가 텅 빈 복도로 퍼져나갔다. 나는 한참동안 거기에 그냥 서있었다. 문으로 가려도 송소리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오히려 어두운 배경에서 그가 더욱 잘 보였다. 나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계속 숨을 헐떡 거렸다.

나는 거기서 달아났다. 체육관으로 도망갔다. 정신을 점령하기 위해서 나는 뛰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까지 뛰었다. 교복을 입은 채로 들어오니 모두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도 가지 않았다. 아직도 송소리의 몸이 잊혀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실은, 나는 평생동안 그 형상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선생님에게는 아프다고 하고 그 수업을 쉬었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공이 튀기는 소리를 들었다. 늦게 송소리가 출석부를 들고 체육관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만나기 전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수업 내내 내 얼굴을 내 팔에 묻은 채로 있었다. 종이 울리고 내 옆을 보니 출석부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출석부를 가지고 (출석부에 열쇠가 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가 문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나는 열이 나서 학교를 쉬었다.


열이 났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상관하지 않았다. 나의 담임 선생님과의 전화는 몇마디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이 무관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내 ‘상태’를 알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해해주었다. 나는 굉장한 죄책감을 느꼈다. 학교를 가지 않은 것은 별로 상관 안했다. 그저 송소리의 얼굴을 보지도 않는, 약한 겁쟁이같은 나에 대한 책임이 와닿았다.

몸이 뜨거운건 사실이었다. 나는 이불을 온 몸에 덮었다. 그리고 벽 쪽을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자기는 어려웠다. 송소리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같았다. 마음이 불안했고 머리는 이상한 것으로 차있었다. 잘 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죽고싶었다.

소리의 몸이 생각났다. 나는 신음했다. 내 목소리는 이불에 막혀서 낮춰졌다. 몸의 온도는 올라갔다. 몸에 대해서 잊으려고 하면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것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것을 겨우 잊으면 어제 일어난 그 일이 기억났다. 무심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송소리가. 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도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지나간지는 모르겠다.

“괜찮아?”

송소리였다. 가방을 매고있는 걸 보니까 학교에서 온 모양이다. 벌써 방과후인가? 시간이 얼마나 지난지 눈치도 못채고 있었다. 내가 문이 아니라 벽 쪽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곧 그게 얼마나 멍청해 보일지 알아차렸다. 나는 거울을 찾으려 했다. 그딴건 내 방에 없었다. 소리는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는 내 손톱으로 머리카락을 빗질 하려고 했다. 내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소리가 그것을 보고 웃는 것같은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내가 중얼거렸다. “뭐야, 이게.”

“아. 어머니가 들여보내 주시더라.” 소리는 아무것도 아닌듯이 설명했다.

“뭐야. 미친 거 아냐. 왜 왔어.”

“응, 프린트 주러 왔어. 우리 반은 결석하는 애가 별로 없어. 그래서 나도 이렇게 온건 처음이야. 반장이니까 내가 해야지. 그거 알고 있었니? 내가 반장이란거?”

“상관 안해. 진짜 그게 이유야?”

“진짜? 응…?” 

“그건 그냥 두고 가. 이제 가줘.”

소리는 들고있던 종이들을 옆에 있던 탁자에 두었다. 그는 내 방을 잠시 둘러봤다. 그러다가 내 눈길을 눈치채서 그만두었다. 나는 더이상 그의 얼굴을 못봐서 반대쪽 벽을 바라봤다.

“시아야, 나 때문에 화났니?” 소리가 말했다.

“뭐.”

“어제 내가 뭐 잘못했니? 시아는 원래 이러지만… 아, 그런 뜻이 아니고. 시아는 평소에도 좀 말이 없지만 갑자기 아프다고 하니 나도 걱정했어. 그리고 지금 나를 보기 싫어하는 거 같애서.”

“그게 아냐. 혼자 있고 싶어.”

“왜?”

“네 알바 아니라고.”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네가 왜… 내가…” 목이 아파서 문장을 끝내기가 어려웠다.
“응? 괜찮아?”

“이건 다… 내가 너를…”

나는 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소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 바로 앞에 서있었다.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소리는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소리의 눈썹이 낮추어진게 정말로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런 표정을 지고 있었을까? 나는 모른 일이다. 그 당시에는 그저 그가 내 눈 앞에서 없어지기만을 바랬다. 내 생각에서 떠나기를.

“내가 미안해. 응? 그러니까 내일은 학교에 와줘. 알겠지?”

“알았어. 이제 가.”

“응. 내일 보자, 시아야.”

나는 다시 이불을 덮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이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들렸던 소리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내 귀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고치처럼 몸을 쭈그렸다. 땀이 흐르는게 느껴졌다. 몸이 너무나도 뜨거워서 더이상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송소리의 몸이 보였다. 아까 봤던 교복을 입은 그의 모습과 어제의 모습이 서로 곂쳐졌다. 나는 그런 생각이 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반신이 고통스러웠다. 나의 왼손을 가슴에 대면서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 손으로 내 가슴을 주물렀다. 간단한 해소방법이었다. 흥분 상태중의 실수인지 아니면 본능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이 왼쪽 젖꼭찌를 꼬집었다. 이떄 목소리가 조금 나왔던 것같다. 오른손은 내 가랑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내 하반신으로부터 전기처럼 찌직거리는 느낌이 온 몸으로 펼쳐나갔다. 몸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숨을 헐떡헐떡 거렸다. 나는 송소리의 향기를 기억했다. 어제의 봤던 희미한 그의 몸의 이미지가 점점 선명해졌다. 나는 손을 움직이면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 그의 향기, 그리고 그의 몸. 그의 모든 것이 나를 쓰러뜨렸다. 그 한 순간에는 모든 창피함과 죄책감이 씻겨 내려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날 한가지 배운 사실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치면서 오르가슴을 느끼면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8

그 다음부터 나는 다시 혼자였다. 고독에 잠겼다. 굳건히 자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내 인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감정이 생겼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의식적으로 송소리를 피해다녔다. 그를 볼때마다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부끄러움인지 성욕인지 아니면 둘다 인지는 몰랐다. 그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만을 알았다. 나는 그것을 피해다녔고 그러는 것은 송소리를 버리는 것이었다.

송소리는 얼마동안 나의 관심을 사려고 온갖 짓을 다 했다. 내 옆으로 의자를 당기기도 하고 모퉁이에서 갑자기 내 앞에 나오기도 했다. 한번은 그냥 복도 반대편 끝에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저 내 갈길만 갔다. 마치 우리는 어차피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내 앞에 송소리는 나의 주목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말같은 것을 걸어서 자신에게 주목을 끄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일부러 자신에게 불필요한 주목을 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바로 그것이 그의 자연스러운, 중력같이 끌어당기는 그 능력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와 시간을 점점 보내면서 그가 잃어가던 힘이었다. 얼마 안가서 그의 주변에는 다시 아이들이 모였고 나는 포기한 듯 했다.


나는 자신을 되찾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없어졌다. 나한테 언제나 있었던 것이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구멍이 났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나? 아니면 누군가가 앗아간 것인건가? 혹시 내가 무언가를 잃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자리를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앉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옆자리를 비워 두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지속될 때에 아무도 내 오른쪽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지 않으면 귀가 간지러웠다. 끝나가는 여름의 태양이 나에게 그림자를 드리울 때 나의 그림자 옆에 다른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면 무언가 허무했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을 들을때 나 혼자서 듣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같았다. 나는 비틀즈의 “Revolver”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고 “Here, There, and Everywhere”가 틀어질 때마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고독은 과소평가된다. 고독은 많은 이득을 보장해준다. 시간을 준다. 생각할 시간을. 더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면 우리는 많은 혁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한테는 순간순간에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뀌는 법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송소리의 내 곁에 존재해주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 없이는 나는 의미가 없는 이야기, 쓸모가 없는 도구였던 것이다. 내 가치는 사라졌다.


결국에 내가 원하던 것은 무엇인가? 송소리와 사귀는 것인가? 나는 그를 좋아했다. 내 본능을 인지하게 된 것이 나에게 모욕감을 갖다준 것이었다. 그러면 그도 나한테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도대체 우리의 여름은 얼마동안 연기될 수 있었을까? 영원히 “우정”과 “사랑”의 장벽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계속할 수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원했던 것인가? 이 질문을 대답하지 못해 나는 무너져내렸다. 내가 이제부터 어떨지를 몰랐다. 바로 내가 비웃던 사랑에 집착한 그 계집애들처럼 되버렸던 것이었다. 내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알았다. 송소리에게 내 감정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가 나를 위해서 짜여있는데도, 노래가 나를 위해 써져있는데도 어쨰서 나는 그 한걸음을 더 빨리 밟지 못하던 걸까? 바보같은 것이다. 해야할 일을 아는데도 안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이 교착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 것만은 아니었다.


일이 일어난 때는 체육 시간이었다. 나는 속이 안좋았기 때문에 관찰만 해야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반은 거짓말이었다. 속이 안좋았기 보다는 내 몸이 본능적으로 나의 내부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었다. 숨소리가 불균형적이었고 걷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불작동하는 기계들에는 신비한 점이 있다. 그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에 적응하게 되면 더이상 그것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내재화하기가 어려워진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이미 나의 현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 몸은 알았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 않은 벽쪽에 기대었다. 그리고 나머지 아이들을 관찰했다. 뭐,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송소리만 보았다. 그는 내가 앉아있는 데서 멀리 떨어있지 않은 곳에 다른 여자아이들과 배드민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땀을 흘리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깨까지 닿는 그의 머리카락은 찰랑찰랑 거리고 있었다. 그가 입고있던 체육복은 몸집에 비해 너무 커서 그의 작은 팔은 막대기처럼 소매 밖에 나와있었다.

나는 이렇게 송소리를 보다가 혹시 그가 눈치챌까봐 다른 쪽을 보고, 그러다가 또 송소리 쪽으로 시선을 옮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나의 행동을 인지하는 사람은 어차피 없었고, 그래서 내가 기분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혐오하는 나 자신 뿐만이었다. 송소리가 내 눈길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 눈을 칼로 찔러 뽑아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뜰 때마다 저기 멀지 않은 데에서 송소리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비처럼 날면서.

그러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는 모르겠다. 근데 어느 순간 – 아마도 또 송소리를 보고있었을 떄에 – 무언가가 날라와서 내 얼굴을 쳤다. (나중에 알았지만 축구공이었다.) 내 왼쪽 눈을 격타했을 것이다. 그 충격은 너무 커서 내 시선은 임시적으로 불구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정신은 어지러웠고, 내 머리는 초토화되었다. 귀만은 제대로 들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고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위에 겹쳤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소리가 서로 겹치다 보니 곧 누가 누구인지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귀 속에서 고막을 찢어버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 웅웅 소리가 반주였다면 마치 뒤섞이는 목소리들 하나 하나가 그 위에 있는 화음같았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질식사하는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내 왼손으로는 쑤시는 왼쪽 눈을 꼭 잡고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붙잡았다. 

나는 다른 한 눈으로 어떻게든 제대로 보려고 노력했다. 모든 것이 희미했지만 내 앞에 누군가가 서있다는 것은 인지하였다. 내 머리가 드릴로 구멍이 뚫리는 것처럼 쑤셨다. 하지만 나는 그를 더 제대로 보려고 그 아픔을 참고 머리를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야는 좀 더 밝아졌다. 내가 모르는 어떤 안경을 쓴 남자아이였다.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그를 둘러싼 다른 남자아이들은 내게 무언가를 묻는 것같았다. 나는 그들이 입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들이 너무 많아 나는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큰 남성의 목소리가 체육관에 퍼지면서 모두 말하기를 중지하였다. 그 순간에 동시에 내 귀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드디어 멈추었다. 나는 내 손을 눈으로부터 내렸다. 현재 상황이 더 자세히 보였다. 남자아이는 옆으로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아마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인지했는지 다시 나에게 돌아섰다. 그때 그가 한 말이 내 등 속으로 냉기를 보냈었다. 아까부터 계속 그가 반복하던 세글자의 말이었다. “미안해.”

그 말을 들으니 내 머리 속에 있던 여러가지 생각은 모두 멈추었다. 머리가 아픈 것과 눈이 쑤시는 것도 전부 중지하였다. 나는 그저 점점 불균형해지는 내 숨소리, 그리고 그가 계속 반복하는 “미안해” – 이 소리들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내 몸은 이 말에 본능적인 혐오반응을 보였다. 나는 땀이 흘리는게 느꼈고 눈에도 무언가 흐르는 것같았다. 나는 결코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어떤 누군가가 나를 위해 걱정해준다는 그 마음에 감동받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더욱 더 크게 느꼈던 것은 모욕이었다. 나에게 겨냥하는 동정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이었고 혐오스러웠다. 실로 비이성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차마 그저 언어로는 감히 묘사할 수 없는 증오로 휩싸였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내가 그 남자아이에게 주먹을 날릴 때까지 얼마나 큰 시간의 격차가 있는지는 기억 안난다. 그저 내가 그를 패는 그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는 것만 안다. 나는 그에게 몸을 던지고 주먹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완전히 죽이고싶다는 살인 의지를 가지고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아이를 때렸다. 이러는 시간은 사실은 5초에서 10초도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남자아이는 곧 선생님에 의해서 때려졌다. 내 기억으로는 그 아이는 아무 반격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밖으로는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다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에게 끌려가면서 그의 얼굴을 봤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선생님의 팔을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소리지르는 목소리는 그날 체육관에 있던 사람들의 고막을 뚫고 찢고있던 것이다.

내가 어느정도 진정을 하고 옆을 둘러다보니까 송소리가 내 옆에 있었다. 그는 걱정하는 얼굴로 나의 팔을 잡고있었다. 나를 제자리에 있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어느새에 그가 온 것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나는 어리둥절하면서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지른 소리때문에 목이 너무 아팠다. 내 앞을 보니까 선생님은 그 남자아이에게 말을 걸고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둘을 보면서 송소리에게 나를 보건실로 데려가라고 말했다. 송소리는 “시아야, 가자.” – 라면서 내 팔을 끌었다. 우리는 둘다 체육관을 나왔다.

보건실까지 걸어가는 시간은 숨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가는 도중에 송소리는 크게 헛기침하고 한가지만 물어봤다. “시아야, 아퍼?” 나는 대답했다. “응.” 그는 보건실에 다 올때까지 더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보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소리는 나를 침대에 앉혀 놓고 수건을 찾으러 갔다. 물이 나오는 곳이 정수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으로 수건을 적시고 내 눈에 갖다 댔다. 나는 약간 신음을 냈다. 그러다가 그의 손에서 수건을 가져간 뒤에 내가 하겠다고 했다. 나는 수건을 내 눈에 대었다. 사실 나는 눈물을 닦기 위해서 그에게서부터 수건을 가져간 것이었다. 하지만 물이 내 얼굴 밑으로 흘러가서 오히려 눈물이 더 나오는 느낌이었다.

송소리는 나보고 선생님이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고,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아무 말도 안했다. 송소리는 나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나는 기분이 너무 어색해서 그를 도로 다시 바라보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는데 송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긴장해하는 것같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아야, 내가 무슨 잘못했니?”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넌 또 이 소리야?”

“응. 왜냐하면 나는 시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그냥 시아가 나한테 말해줬으면 해. 나하고 문제가 있니?”

“아냐. 너는 문제가 아냐…”

“그럼 뭐야? 왜 나하고 말을 안해?”

“그건 너도. 너도 나한테 말을 안걸잖아.”

“기분이 어색하니까. 너는 꼭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겠니? 우리가 그런 관계밖에 안돼?” 

소리는 질문을 하는데 더 날카로운 목소리를 만들었다.

“그건 어떤 의미로 말하는 거야?” 나는 물었다.

“나는 시아를 친구라고 생각해. 하지만 시아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같아. 그게 아냐?”

“…” 나는 순간 대답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문제가 아니면 뭐야? 나는 어떤 얘기든 들어줄게. 정말로.”

“네가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내가 문제지.” 나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응? 왜 시아가 문제야?”

“그건…”

“시아는 언제나 그렇지. 왜 자기 탓만 하는 거야? 왜 자신을 속이고 비하하는 거야?”

소리는 내게 가까이 와서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나는 너를 돕고싶어. 어떻게 하면 네가 너 자신을 좋아하도록 만들 수 있니?”

“너야 말할 것 없어, 송소리. 너도 자신을 속이기만 하잖아. 너는 기만에 대해서 아무 말 할 자격이 없어.”

“뭐…?” 송소리는 크게 헉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너? 시아야…”

“어떤 거야? 내가 답답해? 나같은 아이하고 친구하기 어려운 거야? 그럼 버리면 되잖아. 어차피 너한테는 상관 없으니까.”

“그렇지 않아, 시아야. 난 너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네가 아무리 답답해도 그건 바뀌지 않아.”

“네가 나에게서 단점이라고 찾을 수 있는 것 전부는 다 내가 너한테서 배운 거야. 기만도, 자기 비하도, 전부.”

“너는 네가 하는 말을 스스로 믿을 수 있겠니? 어떻게 이런 말을…”

“그럼 틀렸어? 너는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

나는 소리를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보였다.

“그렇지.” 내가 말했다.

소리는 등을 펼고 일어서며 옆을 쳐다보았다. 옆에서부터 그의 얼굴을 보니 그는 감정이 여러 담긴, 슬프고 후회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들어보니까 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또 호흡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면…”

소리는 깊게 생각을 하며 말했다. 나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그렇게… 따라하는 거니?”
“왜냐하면…”

“네가 말한대로야. 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왜?”

“왜…?”

아아. 그렇구나. 이때였구나. 이제 기억난다.

나의 머리는 새하얘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질문은 대답하면 안돼. 세상에서 그 어떤 질문들이 있어도 이것만은 절대로 대답되서는 안돼. 하지만 나는 이미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숨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내 가슴에서 말이 터져 튀어나올 것같았다. 그것은 언어의 형태를 한 폭탄이었다. 그리고 내 목소리는 그것에 불을 붙일 성냥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 쾅. 나의 사랑이 무너지는 소리.

나는 우는듯이 소리질렀다. 송소리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다시 바라봤다. 그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을까? 충격한 점도 있고, 당황한 것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상처받은 것같기도 했다. 그때의 나로서는 그 얼굴의 의미따위는 크게 상관있는 점은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너를 좋아하니까 너를 모방하고 싶었어. 너의 음악을 듣고 싶었고 너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아니, 나는 너의 음악이 되고 싶었어. 내 삶이 너였던 것처럼, 네 삶도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기침을 했는데 목이 아팠다. 그래도 절대로 송소리를 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머리가 아프고 귀 속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는…”

나는? 이 순간에 나는 폭탄을 터트리면서 나 자신조차 몰랐던 감정들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될 수 있었으면 내 고백이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그 순간에 내 주변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는 것같았다. 전부 검은 공허에 삼켜졌고 남아있는 것은 송소리 뿐만이었다. 그리고 나는 끝이 없는 구덩이로 떨어지면서 그에게 죽기 전의 한마디를 건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너하고 그냥 친구가 되고 싶던게 아니야.”

더이상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더이상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내 삶이 끝난 거나 마찬가지겠다,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굉장히 뜨거웠다. 그때 나는 내 몸의 온도가 아까부터 불처럼 뜨거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지만 그것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죽고싶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자주 있었지만 그때보다 더욱 더 진심어리게 워한 적은 지금까지도 없다.

나는 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바닥을 내리고 앞을 보았다. 송소리는 이미 사라졌었다. 그저 나의 불균형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거기서 조용하게 더 울었다. 그러다가 곧 보건 선생님이 와서 나의 몰골을 보고 얼굴을 닦아주고 무언가를 발라주었다. 아마 선생님은 내가 공에 맞은 것 때문에 울고있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것이 내가 송소리와 마지막으로 말을 한 적이었다.

9

그 앞으로 우리는 한번도 만나거나 얘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접촉을 하지 않으면서 나머지의 고등학교 1학년 삶을 마쳤다. 2학년과 3학년이 되면서도 우리는 다시는 같은 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날 일도 없었다. 우리의 삶은 마치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채로 계속 흘러나갔다. 인생의 17번째 년도의 그 여름을 제외하고서.

나는 계속해서 외톨이었고 송소리는 언제나 여러명의 인구를 곁에 두고 다녔다. 가끔 복도에서 그의 옆을 지나가기도 하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공황발작이 일어날 것같았다. 박자가 비동기화되는 숨소리를 죽이면서 나는 그의 옆을 지나가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눈을 만났다. 송소리가 내 등을 쳐다보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럴 때를 빼고는 다시는 그를 만난 적 없다.

내가 듣기로는 송소리의 가족의 레코드 가게는 장사가 잘 안되었던 것같았다. 그래서 송소리는 3학년부터 알바를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고등학교 마지막의 년도에는 복도에서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졸업 후에는 그는 유명한 대학에 갔다고 들었다. 별로 상관은 없는 얘기다. 지금 그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는 상관없다.

나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 음악을 들었다. 2학년에는 신문부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선배들은 나의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기사들을 써서 내보는게 어떠냐고 권고했다. 실제로 글을 쓰는 후배들을 많이 없었기 때문에 재능을 보였던 나를 가지고 그렇게 구른 거다. 어쨌든 나는 한 달마다 두 기사 씩 – 한 부는 최근 대중음악, 한 부는 옛날 록 음악에 대해서 – 글을 써서 학교 신문에 올리기로 했다. 특히 대중음악에 대한 기사들은 생각보다 인기가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동아리의 다른 멤버들과 말을 열게 되었다. 반 애들도 몇명은 나한테 앨범같은 것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심지어 친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3학년도 계속 이런 글쓰는 일을 하였고 자연스럽게 나는 대학에서도 글 쓰는 일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전에 말한 것처럼 문에창작을 공부하였지만 결국 졸업하고서는 고등학교 떄의 경험을 빌려서 기자 일을 하게 되었다.

나의 고등학교 삶은 그다지 큰 소란없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소리는 계속해서 나의 삶에 영향을 준 요소로 남아있다. 이제 나에게는 삶의 의미나 다름없이 되버린 음악이라는 것이 내 삶에 들어온 이유는 오로지 송소리밖에 없다. 아마도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쓴 것도 혹시나 그가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송소리는 그저 17살때의 그 하나의 여름 동안만 알았지만 그는 나를 바꿔 놓았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도 그때의 일이 없었으면 한참 후에나 깨달았을 테다.) 우리는 결국 맺어지지 못한 사이지만, 송소리와 내가 절대로 이어지지 못할 운명이었다면, 최소한 이 음악이라도 간직하고 싶다. 최소한 그 여름의 기억만은 잊지 않고 계속 살고싶다. 송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할 인생이라면, 그가 나에게 남겨준 것들은 절대로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일까. 그때 그에게 보여주지 못한 나의 멋진 부분을 누군가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봐봐! 사랑은 존재했다! 이렇게 소리지르고 싶은 걸까.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만든 그 약속을 끝까지 고집하며 지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잊어주자는 그 약속.

송소리는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켜주고 있을까? 그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가 나를 바꾼 만큼 나도 그를 바꿀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더이상은 상관 없는 얘기다. 더이상 그가 무엇을 하든, 그도 똑같이 생각하든, 나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야기에 얼마나 눈물을 흘러도 그 한 단어도 절대 바뀌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저 간직할 수 있을 뿐이다. 그저 나만이라도 이 약속을 지켜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이해간다. 타인으로 자신을 구할 수는 없다. 송소리는 나를 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통해서 나는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 음악은 송소리의 구세주였던 것처럼, 나의 구세주가 되었다. 

내가 17살이었을 때 겪은 그 비탄, 그 사랑, 그 음악으로부터 이제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내 귀에는 아직도 그 음악이 들린다. 내 삶은 앞으로도 그 음악으로 물들여질 운명인 것같다.

10

일전에 노래를 썼다. 대학 시절에 피아노를 배워 놨지만 전혀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송소리의 목소리를 기억 속에 유지하고 싶었던 나의 마지막 몸부림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한 실용음악과 선배에게서 물러받은 키보드를 가지고 있다. 나는 졸업하고나서 그 키보드를 한번도 만진 적이 없었다. 글쓰고 먹고 사느라 음악 연주는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어차피 음악을 듣든 쓰든 송소리의 생각만 나서 역겨웠다. (물론 나 자신에게.)

그날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새벽에 잠이 안왔다. 나는 일어나서 커피를 탔다. 컵을 가지고 내가 일하는 책상 앞에 앉았다. 잠이라도 못 잔다면 차라리 깨어나서 무엇이라도 쓰려고 했다. 일로 쓰는게 아닌 글을 써본지 꽤나 오래됐었다. 하지만 그 아무 것도 머리 속에 생각나지 않았다. 불을 켜고 방을 청소라도 하면서 피로를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장롱 안에 처박아 놓은 그 키보드를 찾았던 것이다.

자려다가 막 포기한 그 정신상태에 사람은 온갖 멍청한 짓은 다 하나 보다. 나는 그 키보드를 갖다가 먼지를 털어냈다. 스탠드도 없어서 책상에 두어야만 했다. 건반도 49개밖에 없는 싸구려 키보드 주제에 내 낡아가는 책상을 삼켜먹을 만큼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키보드에 전기를 연결하고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지 시험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긴, 오랫동안 안 만졌다는 것은 또한 고장날 일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 때 잠시나마 배웠던 곡들은 잠시나마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직까지도 손에 익혀져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드뷔시, 쇼팽, 푸치니… 그러다가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치기 시작했다. 너무 낯익은 멜로디라서 잠시 후에 멈췄어야 했다. 내 팔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나는 무언가 다른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 하하, 나는 혼잣말했다. 데이빗 보위 곡이라도 몇곡 배울둘 걸 그랬나.

나는 노래를 쓰려고 했지만 어디서 시작할지를 몰랐다. 애초에 나는 록 음악밖에 몰랐기 때문에 피아노는 별로 쓸모없었다. 겨우 내 두 손바닥을 낄 수있는 이 키보드로 어떻게 파워 코드라도 제대로 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생각났다. 원래는 기타로 쳐야하는 반주를 키보드로 하면 어떤 소리가 날까. 나는 무작위로 A 플랫 장조를 골랐다. 그리고 IV 코드를 기타가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는 것처럼 건반을 쳤다. 그럴싸 했다. 멜로디는 금방 생각났다. 하지만 가사는? 애초에 가사가 필요할까. 당연하다, 로큰롤 음악인데. 나를 죽이고, 나를 구한 그런 로큰롤 음악을 모방하고 싶었다. 그러면 글을 쓰는게 말 그대로 직업인 나는 이 선율에 글로 안 입히면 뭐하자는 건가?

악보는 적지 않았다. 어차피 옛날에도 제대로 못읽었다. 나는 노트북에 내가 방금 생각해놓은 이 멜로디와 함께 부를 가사를 적기 시작했다. 그 17살때의 여름으로 돌아갔다. 어째선지 숨소리가 좋아져갔다. 몸이 시원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그 여름을 써갔다.

오후 4시 텅 빈 교실에서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고
혼잣말로 자신에게 거짓말했다.


나는 카페 창문 밖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며 나뭇잎을 휩쓸었다. 벌써 가을이 되어가나 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앞에는 지혜가 커피를 홀짝 마시며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동창회에 갔다 온 이후 우리는 가끔씩 이런 식으로 만나고 있다. 대부분 지혜가 혼자 떠드는 것을 내가 들어주는 형식이다. “이번에는 PD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라고 하면, 나는 “몰라”라고 대답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가 알아서 떠들기 시작한다. 오늘은 이딴 거나 시켰다는지, 나를 완전 인간취급을 하지 않는다는지. 가끔씩 내 인생에 파고들려고 하면, 나는 몇마디나 한다. 어째서 계속 이 인간하고 만나는지는 모르겠다.

“야. 듣고있냐, 이시아?”

“응.”
“미친. 전혀 안듣고있네, 눈을 보니까.”

“알면 왜 자꾸 나를 부르는 거야.”

“음… 내 상담사가 요즘 비싸졌으니까?” 지혜가 귀여운 음향으로 목소리를 바꾸었다.

“나는 네 정신건강을 대신 돌봐줄 속셈은 없어.” 

“그런가? 하긴, 너같은 사람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건 무슨 말이냐.” 나는 이를 간다. 이 썅년이…

“휴… 약을 먹는 것도 일처럼 느껴져. 현대인의 딜레마인가봐.”

“현대인의 뭐?”

“그런거 있잖아. 늦게 월급을 받는다던가.”

“부르주아에 대한 원망이라던가.”

“그래! 너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재밌긴 하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나는 지혜를 본다. 아까 전의 활발한 얼굴은 사라진 모양이다. 그는 조그마한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으면서 말하기를 계속한다.

“하지만 있잖아. 넌 좋은 놈이야, 이시아.”

“뭐?”

“이렇게나 오래 나하고 만나주는 사람은 별로 없어.”

“정말.”

“그럼. 이번에는 약속이 있다던지, 오늘은 바쁘다던지. 씨발, 내가 모를줄 아나?”

“너는 생각보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사람이니까.”

“…모를줄 아냐…” 지혜의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그래서 남친이 없는 거잖아.”

“썅, 그래. 차라리 남자라도 있었으면 너같은 놈하고 이런 짓은 안한다.”

“그러니까, 나같은 놈하고 있으니까 없는 거라고.”

지혜는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계속 커피를 젓지만, 나한테 더이상 들리지 않던 목소리다. 나는 내 커피를 들고 마셨다. 쓰고, 무엇보다도 미지근했다. 최악이었다. 나는 커피를 내려다놓고 한숨을 쉬었다. 입 안은 죽을 것같은 기분이고, 몸은 조금 추웠다.

“아~ 술 마시고 싶다.”

“벌써?”

“야, 6시다. 저녁 6시. 메이든이 전쟁에 나갈 시간이야.”

“미쳤어. 커피 마시는 데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커피가 더 써진다.”

“넌 안가? 따른 애들 부를지도 모르는데.”

“안가, 안가. 어차피 나는 필라이트보다 강하면 못마셔.”

이 말을 듣고 지혜는 킥킥거렸다. 폰을 꺼내서 자꾸 아래로 스와이프하는데, 아마도 연락처를 내려가고있는 중이였나 보다. “얘는 오늘 안되겠지”, “쟨 자주 안오던데”라면서 혼잣말 하는게 들렸다.

“아, 소리라도 부를까…”

내 입 안에 아직 커피가 들어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뱉었을 것이다. 대신 나는 실수로 테이블을 쳐버렸다. 쿵 소리가 났을 때, 지혜는 놀라면서 나를 바라봤다.

“왜 그러니…?”

“그 이름. 뭐라고?”

“응? 소리, 송소리?”

나는 더이상 동요를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었다. “송소리!”

“야, 뭐냐, 이시아. 무서워.”

“진짜로, 송소리?”
“응…? 내가 대학 때 알바하다가 만난 애인데…”

“뭐?”

“컴다운. 말 끝내고.”

나는 뒤에 등을 기대면서 ‘진정’하는 척을 했다.

“저번 술집에서 다시 만난 적이 있어. 고래처럼 마시더라… 그런 애처럼 안보였는데 말야. 어쨌든, 그 똑같은 데서 한번 다시 볼까 생각중… 이였어.”

지혜는 헛웃음을 하면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했다. 뭐지, 이런 믿기지 않는 현상은? 뭐라도 더 물어봐야 하나? 혹시 전화번호라도 물어봐야 할까? 제기랄.

이미 나는 놓아버렸다고 생각한 궁금증들이 다시 내 머리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생각으로 가득 차기 시작해서 아프기 시작했다. 다시 17살이 된 것같았다. 하지만 내가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나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 나왔다.

“걔… 건강하대?”

“응?” 지혜는 잠시 생각했다. “뭐, 슬퍼서 마신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좋아해서 마시던 것같았어. 지금의 너보다는 괜찮아 보이던데.”

이상하게도 지혜는 분명히 욕으로 의도한 그 말이 나한테는 위로가 되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더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나는 남아있던 커피를 원샷해버렸다. 내 몸을 멍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게 다야?” 지혜가 물었다.

“그래.”

“마치 고등학교 첫사랑 이름이라도 다시 들은 것같던데.”

나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괜찮아.”

“…그럼 하는 수 없지.”

지혜는 눈을 찌푸렸다. 자기 심정에는 무언가 충분을 다하지 않은 것같은 기분인가 보다. 나는 그의 그 한 대답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는데도. 하지만 지혜는 손가락을 막 꼼지락거리다가 이런 말을 했다.

“최소한 말이야. 그 술집은 여기서 좀 더 아래 거리로 가면 있는 데야. 영어로 조그만 간판이 있고, 안에는 막… 음악 트는 그런게 있고, 거기야.”

나는 머리만 끄덕이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지혜는 얼굴을 풀었다. 이제 마음이 후련한 모양이다.

우리는 그 다음 30분동안 아무 말없이 자기 할 일만 하다 서로 자리를 떴다. 그렇게 평소와는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지혜가 한번 다시 말을 걸기는 했다. 내가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때였다. 내가 바로 그 어젯밤 생각해낸 노랫마디였다. “죄 없는 사람들 / 푸른 나무들 / 모두 죽어줬으면 좋을텐데 말이야”.

“뭐야, 극혐인 그 노래는.”

“뭐?” 나는 놀랐다.

“이상하게도 시아같지만 그래도 충격적인 기분.”

“내가…” 나는 말을 계속하기 전에 숨을 다시 쉬었다. “내가 쓴 노래야.”

“진짜?”

“응.”
“가사만 어떻게 하면 좋지 않아?”

“흠, 그런가…”

인생 처음으로 내가 만든 노래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별로 몰랐다. 어차피 지혜는 그리 음악에 관심있어 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그냥 내가 노래를 하는 걸 듣고 걔도 나만큼이나 놀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는지 이 마지막 말로 그 대화는 끝났다.

“뭐… 그래도 너같네.”


기타를 샀다. 미쳤나보다. (의학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몇개월동안 아침을 굶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했다. 근데 나는 알고있다. 지난 반년동안 제때에 받은 월급이 없다는 것. (현대인의 딜레마라… 지혜 녀석 말이 맞았나 보다.) 마치 가수가 되겠다고 가출한 청소년이 된 기분이다. 근데 내가 돌아올 집과 나를 혼내줄 어머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곰팡이로 핀 천장과 3일마다 불이 꺼지는 전등이 달린 원룸 아파트밖에 있지 않다.

일이 한가한 화요일 오후에 나는 내 작업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쳐봤다. 나는 일주일 전에 온라인의 자료로 코드를 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었다. F코드를 치는 법을 빼고는 생각보다 쉬웠다. 혼자서 ‘재능이 있을지도…’라고 생각하는 중에 나는 내가 치는 코드 진행이 전에 100개도 넘는 노래에서 들어본 코드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음. 그렇다고 할 수 없지. 누구 들려줄 것도 아니고. 나는 혼잣말하면서 멜로디를 부르기 시작했다. 멜로디 자체는 자연스럽게 왔다. 하지만 말을 집어넣는 것이 언제나 어려웠다. 지혜한테서 송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로 그의 생각을 하는 것이 다시 어려운 일이 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똑같은 코드를 치면서 똑같은 멜로디를 불렀다. 짜증이 나기 시작하자 나는 기타를 옆에 두었다.

내 눈은 키보드를 찾은 그 장롱으로 움직였다.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나는 다시 베란다에 서있었다. 다시 한번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내 고등학교 교복과 부모님에게 받아온 봄여름가을겨울 CD도 있었다. 나는 장롱을 뒤지는 동안 그 CD를 컴퓨터로 틀었다. 무작위로 앨범의 노래중 하나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저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야…”

나는 드디어 공책을 찾았다. 사실 나는 이 장롱을 다시 열었을 때부터 이것을 찾고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찾고싶지는 않아서 직접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먼지를 털어내고 공책을 펼쳤다. 눈물로 쓰여진 나의 시들. 17살의 나의 필적을 고스란히 담고있었다. 

나는 숨을 쉬기가 좀 더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울에 내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10년전의 내가 쓴 시들을 읽으면서 내 손과 발은 오그라졌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도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동감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완전히 다른 사람이 쓴 것같았으면 더 쉬웠을 것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분하고 실망스러웠다.

그중 눈에 띄는 시가 있었다. 송소리와의 마지막 대화를 가지기 며칠 전, 여름의 종결에 쓴 그 시였다. 내 머리 속에 있던 멜로디와 딱 맞았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그렇게 특별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시를 쓰면서 생각했던 그 노래가 바로 지금 틀어지고 있던 봄여름가을겨울의 곡 ‘내가 걷는 길’이었다. 마치 엄청난 운명의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영어에는 ‘serendipity’라는 단어가 있다. 의도치지 않은 우연의 발견이라는 뜻이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기타를 들었다. 한번 심호흡을 한 뒤에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와 혀는 곧 그 반주를 따랐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중 가장 아픈 건
추억에 박힌 여름
짙은 향수만을 느낄 뿐이다


또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썼다. 이름은 ‘더 스미스와 더 큐어’. 나는 픽시즈가 더 좋은데 말이다.


금요일 저녁 10시. 편집부에서 일이 더 생겨서 늦게 퇴근해야 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재택근무였다. 요즘은 글 쓰는 일도 전부 메일로 주고받고 하는 거다. 직접 편집물 건물에 가도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보는 일은 없다. 자신이 주어받은 일만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이게 좋은 점이긴 하다. 하지만 왜 하필 필요없는 출근을 시키는지 이제 알겠다. 그 건물 안에 있으면 근무시간이 늘어도 아무리 도망칠 수 없다. 상당한 선배라고 여겨지는 나도 부장의 말을 거스를 수 없다.

쌀쌀한 11월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입김을 불었다. 하얀 김이 바쁜 도시 거리로 향해 퍼져갔다. 야경은 나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빛났다. 북적이는 군중을 스쳐가면서 나는 걸었다. 잠바의 소매를 꽉 잡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다봤다. 이상하게도 집에서부터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누울 기분이 아니라 마실 기분이 들었다. 물이 필요했다. 이런 날일 수록 목이 더 마르는 법인가 보다. 나는 쌍방향으로 비춰오는 빌딩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술집은 질색이었지만 아직 열려있는 데는 술집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오른쪽에 가장 가까이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간판은 ‘Stardust’라고 읽혔다. 폼이 나는 이름이지만 문은 굉장히 낡은 미닫이 문이였다. 너무 낡아서 안이 다 보일 정도로 재질이 투명했다.

들어가자마자 내 뺨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단 한번에 뒤에 있는 문을 닫았다. 혹시 부서질지도 몰라서 조심하게 닫았다. 음악이 들렸다. 좀 오래된 팝송이나 트로트 노래가 술집 안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기 주인의 취향인가 보다.

술집은 밖에서 보였던 것보다 훨씬 더 아늑하고 넒었다. 사람도 꽤나 있었는데, 아마도 탁자 절반은 무리들로 차여있었다. 나는 좀 더 앞으로 들어갔다. 내 우측에는 카운터가 있었고 그곳에도 의자가 있었다. 몇명의 사람들이 서로 간격을 두어서 홀로 마시고 있었다. 나도 거기 어딘가에 앉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카운터 뒤에 아저씨는 조용하게 잔을 닦고 있었다. 나는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돈을 낼만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계속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좌측에 나한테 가장 가까이로 있던 남자들은 큰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그 술집 안의 다른 사람들은 잊어버린 시대에 대한 향수가 담겨져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 나는 그들이 웃고있던 건지 울고있던 건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카운터 옆에 있던 탁자에는 조금 뜻밖에도 고등학생 나이쯤 될 소년 소녀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오늘이 처음으로 취하는 날인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들은 남자들보다는 시끄럽지 않았지만, 특히 여자아이들의 소리는 상당히 컸다. 그들은 서로를 만지고, 머리를 때리고, 뺨을 치면서 난리를 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앞으로 더 가니 눈에 띄는 탁자가 있었다. 맨 구석에는 한명의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자리는 3-4명은 같이 앉을 수 있을만큼 넒은 데였지만, 여자는 중간에 홀로 있었다. 여자는 머리를 탁자에 쳐박은채로 자고있던 것같았다. 머리카락이 매우 길어서 탁자에 여리저리 퍼져있었다. 여자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아마도 회사에서 퇴근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자리 앞에 서서 여자를 계속 지켜보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비볐다. 눈은 둘다 빨갰고 부어있었다. 여자는 한숨을 한 뒤에 고개를 돌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여자는 앞을 보면서 나를 눈치챘다. 여자는 일어서는 것을 멈추었다. 계속 나를 바라봤다. 머리카락이 다 망개져서 그의 얼굴을 많이 가리고 있었지만 눈만은 보였다. 우리는 계속 서로를 쳐다봤다.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얼굴 앞의 머리카락을 치웠다. 그리고 세수하듯이 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다시 나를 봤다. 여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시아야? 이시아지?”

여자의 목소리는 맑고 예뻤다. 방금 취했다가 깨어난 사람한테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마치 고등학생의 목소리였다. 어리고, 가늘한 목소리였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나는 여자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축 처진 눈썹과 매끈한 입술. 반쯤 서있으니까 키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작았다. 너무나도 작았다. 조금 거리가 떨어져있는 것도 그랬지만, 입고있는 정장이 웃길 정도로 귀여운 크기였다. 나를 순식간에 이렇게 매혹할 수 있는 여자는 한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여자는 송소리였다.


송소리는 바뀌었다. 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니 마치 17살 때의 그 소녀와 똑같은듯 말했다. 그것은 무섭기도 했다.

송소리는 내가 대답을 할 수 있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울면서 내가 진짜로 거기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어쩔 줄을 몰라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나는 송소리를 앉혔다. 그는 울먹이면서 온갖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단어들인지 아니면 신음인지는 나는 잘 몰랐다. 나는 감이 들어서 그에게 반쯤 차있는 맥주잔을 건네주었다. 그는 한번에 그 잔을 비웠다. 송소리의 얼굴은 다시 빨개졌다. 그는 큰 소리로 맥주 두 잔을 더 시켰다. 나는 시계를 봤다. 그리고 송소리 옆에 앉았다.

“시아야… 나는 너를 만나서, 너무…”

송소리는 딸꾹질해서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나는 등을 두드려줬다. 지금까지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너… 나 기억하는 거 맞지?” 송소리가 물었다.

“당연하지. 너를 잊을리가 없어. 송소리.”

송소리는 이 말을 듣고 웃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말로 처참하고 우울해보였던 그가 나를 보니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역할이 바뀌어야 되는게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 생각 많이 했어?” 송소리가 맥주를 홀짝이고 말했다.

“…무슨 10년만에 다시 만나고 물어보는게 그따구니?”

“히히히.” 이 웃음소리도 여전하다. “시아, 너 맞장구 치는게 좋아졌구나?”

“그럼, 많이 했다고 말하면 뭐랄 거야? 기분 나쁘겠지.”

“행복할텐데.”

송소리는 맥주를 마시려다가 중간에 내 얼굴을 보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10년동안 별로 바뀐 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이상 진지병 걸린 그 소녀가 아니다. 행복할 때는 행복하다고 표시해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나는 송소리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행복했다.

“그럼 너는 내 생각이라도 했냐?” 내가 물었다.

“그랬을지도.”

“지도?” 나는 눈을 찌푸렸다.

“했어! 했어.” 송소리는 탁자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탁자가 흔들리면서 채워진 다른 맥주 한 잔이 조금 쏟아졌다. 나는 잔을 바라봤다. 아까 송소리는 전부 자기가 내주겠다고 말하긴 하였다. 그렇다고 그게 문제인 건 아니였다. 나는 술을 딱히 안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취하는 것은 정말로 싫다. 술을 마시는 것에 그 어떤 좋은 점이 있다고 해도 그 다음에 오는 숙취만큼 갚아줄 가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원리 상으로 회식이라도 술은 마시지 않는다. 맥주도 마찬가지다.

나는 맥주 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목이 시원해졌다. 목이 말라서 술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잔을 마시고 나서야 드디어 기억해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 바로 졸림이 다가왔다. 나는 그것에서 깨어나려고 다시 그 차가운 맥주를 내 목으로 들여보냈다.

송소리는 폰을 보고 있었다. 폰에는 사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송소리는 한 남자가 나타나있는 사진이라면 전부 지웠다. 남자만 혼자 있는 사진도 있었고 송소리와 함께 웃고있는 사진도 있었다. 송소리는 각 사진을 1-2초 쯤 보고 있다가 가차없이 지워버렸다. 마치 사진 하나하나에 있는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되새긴 다음 기억 속에서 없애버리는 것같았다. 이 일을 하는 송소리의 표정에는 딱히 아무 감정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대단한 단호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등만 보이는 한 사진에 송소리가 좀 더 오래 머물었다.

“누구야?” 내가 물었다.

송소리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 였지.”

송소리는 맥주를 다시 마시고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제 가방을 싸더라. 헤어지자고. 그리고 나갔어. 뭐라고… 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딱히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 좋아졌대.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 자기가 바람을 피기 전에 먼저 그만하재.”

“…” 나는 탄식하였다.
“뭐라고 얘기를 해야할 것같아. 근데 이제는 모르겠어. 그냥… 기억하기도 싫어.”
“응.”

송소리의 목소리에는 고통이 담겨있었다. 그 고통을 듣고 나도 아팠다. 혹시 내가 안으로 환호를 했어도 이상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통은 내가 아직도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송소리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덜해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아무 상관 없다. 나는 송소리를 가질 필요 없다. 그저 그가 다시 웃을 수만 있다면…

“있지, 결혼하자고도 했어. 걔가.”

“그 사람이?”

“자는데 깨우더라. 그것만 말해주려고. 그게 1년 전.”

“…” 나도 맥주를 마셨다.

“인생이란게, 마음대로 가는 것만은 아닌가봐. 어렸을 때는 모두 좋아해줬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게 익숙해졌을지도 몰라. 거만했나봐, 나.”

“응. 나는 잘 알아. 그런 기분.”

사실이었다. 그것을 느끼게 만든 장본인이 내 눈 앞에 있었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송소리가 위로를 받을까? 어른이 됐는데도 아직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동물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도와주고 싶어하는게, 인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송소리한테 물었다.

“좋아했어?”.

“응. 근데…” 송소리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나만 그랬을지도.”

“아냐.”

“어?” 송소리는 나를 쳐다봤다.

“분명 그 사람도 좋아했어, 소리를. 하지만 사람들은 바뀌는 거야. 그건… 누구를 탓할 수 없어.”

송소리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탁자에 누웠다.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소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송소리는 별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정말로 부드러웠다. 한참동안 빛질이 안돼서 헝클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촉감이었다. 나는 잔을 비울 때까지 송소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었었다. 송소리가 비틀거리자 나는 그를 부축해주었다. 하지만 송소리는 나를 뿌리치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송소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무언가 귀에 익숙한 노래였지만 가사가 너무 웅얼거리며 나와서 잘 인식하지를 못했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면서 웃었다. 나는 송소리를 따라갔다.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내 뺨이 얼어지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춥지는 않았다. 더이상 춥지 않았다.

내 전화기가 울렸다. 편집부장한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부장은 수고했다고 말한 다음, 내가 이번 밤에 체크한 기사들에 대해 지적하기 시작했다. 아침까지 고쳤으면 한다고. 나는 그냥 계속 “알겠습니다”라고만 말했다. 나는 별로 집중하고있지 않았다. 나는 “예”라고 대답하고 실수로 딸꾹질했다. 부장은 웃으면서 혹시 술마셨냐고 물었다. 그는 놀라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럼 잘 들어가고, 또 미안하다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송소리가 내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만났을 때하고 비슷한 기분이다. 나는 일때문에 좀 전화가 왔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비틀즈…”

송소리가 넋이 나간채로 말했다. 그렇다. 내 핸드폰 벨소리는 비틀즈의 곡 “Here, There, and Everywhere”였다. 어째서 송소리가 나에게 첫번째로 들려준 노래를 지금까지 벨소리로 간직하고 있었을까? 생각했던 것보다 나한테 미련이 남아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송소리의 기억을 풀어 내보내줘도 잊고싶지는 않는 나의 마지막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냥 좋은 노래라서 그렇게 설정했을 가능성도 언제나 있다.

“아직도 듣는 거야? 비틀즈.” 송소리가 물었다.

“비틀즈만 듣는 걸로 아니? 네가 들려준 건 아직도 다 들어.”

“아… 아… 그렇구나…”

송소리는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그는 눈물을 닦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 길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도 없고 가게도 전부 닫혀있었다. 이것은 나를 안심시켜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얘는 기뻐서 우는 건가? 그렇게 보였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어떻게든 이 애한테 미소를 주고 싶었다.

“있지, 네가 들려준 노래들 때문에 나도 이제 노래를 쓰게 되서… 하하. 그게 웃겨서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뭐라고 하는지도 잘 몰랐다. 정말로 웃긴 얘긴지도 잘 확신은 안갔다.

“노래를? 시아가?”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던 그의 눈은 번쩍 떠있었다.

“어? 응…”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강해서 나는 더욱 당황해졌다.

“들려줘.”

“뭐?”

“들려줘야돼. 나한테.”

송소리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계속 내 눈을 보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의 하얀 입김이 내 잎까지 닿았다. 나는 그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어쨋든 우는 건 그치게 만들었으니까 무언가는 먹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손에 있던 핸드폰을 다시 켰다. 내가 그 아침에 녹음했던 데모를 찾았다. 통기타 반주밖에 없는 녹음이었다. 멜로디는 내 머리 속에 있었다. 오늘 일하면서 가사를 생각해내려고 저장해놓았었다. 그리고 생각해내긴 했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그 데모를 틀었다. 볼륨을 조금 올려서 송소리 얼굴 곁에 갖다 댔다. 통기타의 어쿠스틱 소리가 바람을 장식하였다. 송소리는 집중하며 그것을 들어줬다.

“이건 가사가 있어?” 송소리는 대답을 이미 아는듯이 말했다.

“응? 그래.”

“불러줘.”

“뭐? 안돼!” 내 대답은 당연했다.

“불러줘. 제발. 네가 그때 내 집에서 노래부른 것처럼.”

나는 순간 망설였다. 내 본능적인 반응은 “싫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부끄러워서? 그런 유치한 핑계가 어디있는가? 나는 송소리를 봤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청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드디어 알았다. 나는 이 여자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결심한 나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싶다고 애원하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내가 그에게 안된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눈을 감았다. 이미 첫번째 절은 지나갔었다. 나는 후렴구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멜로디는 내 머리 속에 있었던 것보다 저음으로 불러야 했다. 나는 손을 가슴에 대고 진동을 느끼며 목소리를 조절했다. 내 다른 손으로는 소리의 손을 계속 잡았다. 내 목소리는 추운 바람에 떨리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씩 부를 때마다 또 다른 입김이 나갔다. 나는 입술이 얼고 있는데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나의 유일한 청중을 위해서 노래했다. 송소리는 나의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나도 그대로 그의 손을 더 쎄게 붙잡았다. 나는 멈추지 않고 노래했다. 그 노래는 하늘로 나는듯이 퍼져나갔다. 음악은 공기로 변하고, 사라지고, 다시 소리가 되었다.

네 손이 내 손에 닿으며
눈을 감고 음악에 잠긴 그때가
그 순간이 최고의 곡이었다

후기 – ‘여름비탄 사후검사’

‘17살의 여름비탄’ 소설의 역사는 ‘17살의 여름비탄’ 앨범의 역사와 같이 시작했습니다. 저는 보통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앨범을 만드는 도중에 음악을 바탕으로 글을  쓰던가, 아니면 글을 작필하는 도중에 이야기에 대한 노래를 작곡한다던가. 저한테 이 매체들은 그저 이 이야기들을 전달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이야기를 잘 전달한다면, 그 쪽으로 만드는게 당연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앨범을 같이 들으시면서 이 작품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소설의 문구들을 가사로 쓰기도 하였고, 앨범의 가사를 소설에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앨범은 소설과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건들의 구성도 조금 뒤죽박죽 되어있죠. 앨범이란게 원래 완전히 뮤지컬 형식으로 하지 않는 이상 직설적인 플롯을 전달하는게 어려워서, 작곡 작업중에 노래들의 순서를 많이 바꿨기 때문입니다. 앨범에서는 무엇보다도 ‘음악의 흐름’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소설’의 여름비탄은 17살의 이시아를, ‘앨범’의 여름비탄은 어른의 이시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각도, 다른 문맥으로 본다고 할까요. 앨범을 소설의 음악화라던가 소설을 앨범의 소설화라고 보기 보다는 다른 도구를 이용해서 만든 하나의 똑같은 스토리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2019년의 여름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미디어 창작’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저 한달동안만 지속되는 수업이었습니다. 이 수업에 저는 ‘영상 매체’를 제작하는 과제를 받았습니다. 영상이었다면 아무 것이나 괜찮았습니다. 영화라던가, 블로그라던가, 게임 실황이라던가. 저는 언제나 제 음악을 이용한 뮤직 비디오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지나친 목표였긴 했지만 뮤직 비디오를 창작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만들어둔 노래 중에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곡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디오를 위해 특별히 한 곡을 새로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5월의 마지막 날에 작곡한 그 노래가 ‘로큰롤은 나를 구원하였다’입니다.

이 곡을 작곡했을때 이미 비디오의 콘티는 제 머릿속에 대충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사를 쓰면서 딱히 하나의 이야기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고뇌를 표현하는 여자아이의 심정’을 쓰고 싶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곡의 들어있는 ‘너’는 남자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콘티를 본격적으로 그려나가면서 제 머리 속에 이 두명의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확실해져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몇개의 곡을 더 썼습니다. ‘짙은 향수’와 ‘더 스미스와 더 큐어’ 등의 곡이 이랬습니다. (실제로 이 곡들이 제일 먼저 써진 곡들이었기 때문에 제 10장에 시아가 쓰는 노래들이 바로 이 노래들인 겁니다.) 그러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이 캐릭터들에 살을 붙이기 위해서 이 소설을 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7살의 여름비탄의 기원이었습니다.

저는 곤란한 여지에 놓여 졌습니다. 뮤직 비디오, 앨범, 그리고 소설 – 이 세가지를 동시에 작업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중 가장 신속하게 완성할 수 있다고 확신한 ‘앨범’에 먼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혹시 이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보통 30-40분의 음악이 들어있는 하나의 ‘앨범’을 완성하는 것은 굉장히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당시에 이미 지난 3년보다 더 넘게 음악 제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자신있는 분야가 음악이었습니다. 소설은 그것보다 더욱 오랫동안 써왔지만 그 최근에 완성한 작품은 별로 없었고, 뮤직 비디오는 그말대로 처음으로 도전한 매체였습니다. 그래서 앨범 작업에 요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때가 6월 17일 쯤이었습니다.

6주일의 작업 후에 ‘17살의 여름비탄’ 앨범은 완성돼었습니다. 저는 8월 9일에 앨범을 bandcamp.com에 자비출판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 미디어 창작 수업은 이미 끝났었고 저는 시간안에 과제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앨범은 예상 밖으로 상당한 반응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오로지 한국어로만 가사를 쓴 앨범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외국인 지인들의 반응은 꽤나 뜨거웠습니다. 사람들은 ‘요루시카’나 ‘supercell’같은 일본 인디록의 풍미가 ‘위저’같은 서양 이모 음악이 합체된 이 앨범을 듣고 흥미를 느꼈던 것같습니다. (실제로 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받긴 하였지만, 앨범에 가장 큰 영향은 ‘신세이 카맛테쨩’이었을 겁니다.)

앨범이 나왔으니 저는 곧 바로 뮤직 비디오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개월이 더 지난 후에 ‘로큰롤은 나를 구원하였다’ MV를 완성했습니다. 이 MV는 주로 요루시카의 ‘言って(말해줘)’ MV에 많은 영향을 받은 영상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잘 나온 것같습니다. 이 영상을 드디어 마치고 그 미디어 창작 동아리 담당이었던 외부 선생님에게 메일로 보내니까 많이 놀랐던 것같습니다. 이 정도의 작품을 완성한 애는 별로 없었다고. (솔직히 이 후기를 제 자뻑으로 완전히 채우는 것은 조금 싫지만, 일단은 저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았던 것은 소설이었습니다. 저는 음악은 매우 빠르게 작업하는 편입니다. 15분만 있으면 곡 한개를 작곡할 수 있고, 하루만 더 있으면 반주를 완성할 수 있고, 일주일만 더 주면 가사를 쓰고 보컬도 전부 녹음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냥 음악이란 것에 그다지 큰 품질 기준 인식이 없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그냥 일단 만들어보고 인터넷에 올려보는 성향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은 다릅니다. 글은 어릴 적부터 써왔지만, 도저히 속도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몇십자만 쓰는 것에도 몇주일이나 걸리고, 또 그걸 다시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쓰는 때도 잦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글 쓰는 일은 저한테는 느린 일이여야 하나 봅니다.

그래서 약 16개월의 작업 후에 드디어 이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앨범은 6주일, 뮤직 비디오는 약 2주일, 그리고 소설은 약 64주일 걸렸습니다. 

이야기 자체에 추가할 말은 별로 없는 것같습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지향의 GL/백합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달콤씁쓸하고, 조금 짜증나지만 공감은 가는, 그런 두 여자아이의 관계를 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밝고 좋은 성격의 아이가 우울한 아이를 구원해준다’라는 식의 클리셰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송소리는 이시아를 구하지 못했죠. 사람은 타인에게서 구원을 바라기만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의 일은 그 사람이 자기자신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일입니다. (이 말은 ‘바케모노가타리’에서 빌려온 말이네요. ‘네가 멋대로 혼자서 구해지는 것뿐이야.’)

소설을 작필하면서 이시아의 1인칭 시점으로부터 서술할까, 아니면 3인칭 서술자를 쓸까 고민했습니다. 아마도 3인칭을 썼다면 좀 더 잘 읽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짜증이 나는 부분들도 없었겠죠. 하지만 사실 시아는 이 소설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아의 생각, 시아의 정신상태, 시아의 세계관. 이것들이 없으면 이 소설은 이 이야기만의 특별한 점을 잃겠죠. 실제로 이시아의 시점에서 쓰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고, 아마도 이 소설이 이렇게나 오래 걸린 주요인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못봐줄 정도로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가진 아이죠. 그것을 읽은 당신이 느낀 고통보다 그것을 쓴 제 고통이 더욱 클 겁니다. 그래서 이시아가 어른이 된 시점에서 소설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릴 때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레즈비언 소녀였어도, 결국에는 모두 어른이 됩니다.

엔딩을 쓰는 것도 작필이 오래 걸린 이유중 하나입니다. 제 2장~제 9장까지는 앨범은 완성한 시기부터 이미 다 제 머리 속에 있던 플롯입니다. 시아와 소리의 만남, 그들이 보낸 여름, 그리고 헤어지게 된 그 날. 이 부분들은 그저 머리 속에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글로 담기만 했으면 됬습니다. (당연히 당신이 읽은 건 수많이 다시 고쳐써서 쓴 원고인거죠.) 하지만 그냥 그걸로만은 이야기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1장을 어른이 된 시아의 시점으로 한 다음, ‘본론’은 바로 이 어른 시아의 회상 식인 액자 구조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할지 솔직히 몰랐습니다. 그냥 제 9장으로 끝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결말이 씁쓸한게 좋아도, 저는 이게 ‘허탕한’ 기분의 씁쓸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멈추고 싶어서 대충 마무리를 지은 것처럼. 그래서 제 10장을 쓰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 10장부터 또 다른 소설 하나를 쓸 수도 있었습니다. 어른 시아와 어른 소리가 사회인으로 살면서 다시 한번 서로의 그 순수했던 관계를 불러일으키려는 이야기. 혹시 제가 이 소설이 장편 소설로 쓰기를 원했다면 아마도 그것까지 썼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16개월이 걸리겠지만요. 아직도 쓸 수도 있겠죠, 속편으로.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야기의 절반이 마치 다른 절반에 추진력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구조의 이야기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저는 이 플롯이 400매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라고 판단했습니다.

17살의 여름비탄은 저의 첫 소설이나 다름없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제 취미로 글을 쓰는 것도 10살을 넘게 해왔지만, 전부 수많은 계정과 필명으로 흩어져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쓴 것들 중에서 자랑스러운 작품은 하나도 없고요. 저는 이 JohnJRenns 이름으로는 주로 음악은 만들어왔고, 소설을 게시한 건 단편 몇개와 휴재하고있는 장편 연재물밖에 없습니다. (‘너무야’라는 이름의 연애소설인데, 언젠가는 결말을 연재해볼까 생각중입니다. 근데 그리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라서…) 여름비탄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작가로서의 JohnJRenns를 잘 소개해주는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많이 즐겨주셨으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 이름으로 이런 식의 GL물을 더 올리고 싶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괜찮다면 음악도 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문학보다는 음악에 재능이 더 있는 것같아서 주로 만드는 건 음악이니까요. 특히 2021년에는 한달마다 앨범 한개를 만들어 게시할 예정입니다. 많이 기대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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